2013년 9월 8일 주일예배 설교
고린도전서 1:26-31
야구는 혼자 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경기를 승리해도 그 공로가 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뛰어난 투수가 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투수가 9명의 타자를 9회 동안에 모두 삼진으로 잡았습니다. 다른 야수들은 흔한 땅볼도 잡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투수가 홈런도 쳤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1:0으로 끝났습니다. 이러한 경기라면 그 승리의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투수입니다. 다른 선수들이 도와 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선수가 그 승리의 공로가 각각 자기라고 주장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라도 자랑한다면 위대한 투수가 있는 팀의 일원이기 때문에 승리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승리한 팀이 이름도 없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동네 야구팀이고 패배를 한 팀은 작년도 월드시리즈를 우승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오로지 그 투수 한 사람에게만 모든 영광이 돌아가야 정상입니다. 승리한 팀의 일원인 일반인들은 그 위대한 투수가 있었기에 이렇게 놀라운 승리가 가능했었다고 인터뷰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러한 프로팀을 이긴 것이 자신의 뛰어난 실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모두가 비웃을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실제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야구라는 운동에 대해서 조금만 알면 이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를 창조하고 악한 마귀를 영원히 멸하고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정말로 크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어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큰일입니까! 얼마나 위대하신 일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도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광대하신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구원 역사에 우리도 한 몫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이 되었는지, 어떠한 진행이 되고 있는지, 언제 끝이 나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승리로 이끄는 일에 내가 큰 역할을 했다고 인터뷰를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처럼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랑할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역사에 남을 위대한 경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는 행복으로 충만하고, 그 위대한 경기를 직접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던 것을 감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진행하시며 마치는 구원역사의 놀라운 일을 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주 안에서 자랑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공로를 내세웁니다. 자신의 업적을 자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마치 자신들이 믿음이 있어서 받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남들 보다 교회에서 또는 사회에서 각종 봉사와 헌신을 더 많이 했기에 주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세운 기업을 내세웁니다.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물들이 마치 자신들의 업적인 것처럼 간증(?)하고 다닙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자랑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자신을 자랑하고 높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려고 우리들을 부르셨는데 그렇게 선택을 받은 우리들이 어느 새 교만하고 악하여져서 스스로가 잘난 것인 양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무지한 일입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 안에서 자랑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니라 실상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 없는데도 이러한 승리의 영광에 거하게 하시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포장하면 안 됩니다. 스스로 헛된 승리의 영광에 도취하여 자신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오직 주 안에 있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1.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렀던 그 때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세상에서 인정받는 수준에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니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사람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따르는 사람이었습니까? 뛰어난 학벌과 명망 있는 가문의 후예였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은사로 사람들이 주목하고, 칭송하자 마치 자신이 원래부터 그러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자랑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현실이고 수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불러 주실 때에 저들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기준으로 볼 때에 고린도 교인들은 ‘지혜’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높은 교육을 받거나,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능한 자’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아서 권세 있는 자도 없었고, 국회의원이나 장관, 총리 같은 정치가도 없었습니다. ‘문벌 좋은 자’도 없었습니다. 이 말은 상류 계급 즉 출신 성분이 좋은 귀족 가문에 속한 자를 말합니다. 지금도 큰 차이는 없지만 당시에도 ‘교양’, ‘권세’, ‘출신 성분’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기준에서 볼 때에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전혀 그런 자들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굳이 이러한 사실을 상기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러한 세속적이고 외부적인 조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세속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도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말에서 ‘복’은 절대로 세속적인 기준을 만족 시키는 ‘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면 한참 모자라는 자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심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입니다.
27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부끄럽게’라는 말은 ‘불명예스럽게 하다’, ‘욕되게 하다’, ‘창피하게 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에 미련한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실세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지혜가 있고 강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심으로 창피하게 만드시고, 불명예스럽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멸시 받고, 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무슨 위대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죄악된 인간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뭐가 있으면 그것을 믿고 교만합니다. 돈이 있으면 그 돈을 믿고 교만합니다. 학벌이 있으면 그 학벌을 내세워서 자신을 높입니다. 남들 보다 조금 잘하는 재능이 있으면 그 재능을 보여주려고 안달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높이지를 않습니다. 아무 것도 없어야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쫄딱 망해야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잘 나갈 때에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천하고 멸시 받으며 없는 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무엇이 있으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내가 이러한 능력이나 배경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서 사용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택하신 자들을 통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폐하신다는 말은 끝낸다는 사실입니다.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갈릴리의 어부들은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없는 자들인 어부를 선택하사 로마의 황제와 같은 있는 자들을 폐하셨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신분과 재물이나 권세는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쓸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사용할 데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그 어떤 위치, 그 어떤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죄인을 구원하는 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의인이라 부르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속사는 오로지 하나님만 행하시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육체도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일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육체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어머니인 마리아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있지 않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모든 육체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웁니다. 받은 은사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교회에 큰 유익을 주었는지를 말하고 다닙니다. 자신이 받은 은사가 최고인 것이라고 교만해 집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에 아무 것도 없었고, 미련하며, 천하고 멸시 받으며 없던 상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파벌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세우지 않고 세상적인 지혜와 신분과 업적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을 귀중하게 여기고 헌신하지 않고 세상의 직분을 내세우며 교회 안에서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교회에서 분란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을 두고 사도 바울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의 현실을 생각하시고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 것도 없었고, 미련하며 멸시 받는 상태였던 때를 기억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칠 것이 없습니다.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겸손해 집니다. 자신의 현재 상태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 순간부터 하나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자들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현재 조금이라도 받은 은사가 있다면 그 은사를 통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높여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선한 말과 행실을 통하여 받은 열매가 혹시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온전히 하나님께서 섭리하여 주신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입각하여 학벌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결과로 얻은 재물과 성공을 얼마든지 뽐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30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원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뛰어난 인품과 능력을 보고 우리가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능력과 신적인 면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의지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에게로 나아갔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인이 그리고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예배를 드리며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나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바로 밑에 위치한 계급적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시며 지혜 그 자체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인격적인 표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십니다.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죄인된 인간을 위하여 의로우심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인 하나님께서 죄많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존재로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의로우심으로 우리를 품어 주셔서 우리의 죄가 가리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를 의롭게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 분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로 의롭게 될 수 없는 자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는 절대로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지셨기 때문에 그와 연합한 죄인인 우리도 ‘거룩한 무리’인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지 않고 화목하게 될 수 있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거룩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절대로 거룩하게 될 수 없는 자가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그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냥 사하여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하여 ‘구속함’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구주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고 누구를 자랑하시겠습니까?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31절에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과 구속하심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로워지고 거룩케 되었으며 구속받았기 때문에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나의 공로, 나의 업적, 나의 행실을 자랑할 그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함입니다. 의인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우리의 태어남과 장성함과 사라짐의 모든 과정 속에서 나의 나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 외에는 설명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모든 영광 주님께 돌려야 합니다. 주 안에 있음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는 성도가 있다면 가짜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러한 자를 뽑아버리실 것입니다. 막강한 투수의 능력으로 승리한 팀의 일원으로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자신이 이 승리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 팀에서 제외시킬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제하실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혹시 세운 공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가 누구에게로부터 나왔습니까? 그 사람이 얻은 생명과 재물과 명예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받을 수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재물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큰 착각입니다. 많은 헌금을 드리는 자는 더욱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 앞에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마귀가 그를 시험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렇게 많이 드리는 것이 바로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여러 가지로 봉사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한 시간과 건강과 물질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봉사를 하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봉사를 감당하도록 모든 여건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봉사를 남들과 비교하여 교만해지거나 다른 연약한 자를 함부로 판단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귀의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온전히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봉사를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교만해지고 불평을 하게 되고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성도가 주 안에서 자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학벌과 학문의 성취와 출신 배경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높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부르신 그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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