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9일 총회선교주일 설교
사도행전 19:8-20 (Acts 19:8-20)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3차에 걸친 선교 기록은 사도행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큽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위대하여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한 사실이 위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기록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에서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을 넘어서서 이방인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은 2년, 곧 이어 2차 전도여행은 3년, 그리고 계속하여 이듬해에 3차 전도여행은 약 6년의 여정입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에서 특별히 에베소에서만 3년이라는 긴 시간을 할애해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해안에 있는 도시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초대교회 당시의 에베소는 그리스-로마와 서방 아시아의 내륙을 연결하는 해로와 육로가 만나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기 때문에 무역이 발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다양한 이교 문화가 발달한 도시입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는 아데미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이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선교현장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힘이나 특별한 물건을 통하여 희한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주의 말씀으로 구원을 얻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며 그 본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주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8절에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이 것 말고는 다른 일이 없습니다. 땅을 밟는다거나, 대규모 부흥 집회를 열어서 온갖 순서를 통하여 사람들을 모으고 자극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습니다. 그저 가는 곳마다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구원 받는 사람들을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담대히’ 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은 유대인의 회당입니다. 그 회당은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바울이 믿는 예수님을 참람하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게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전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실상 모든 전도자들이 선포하는 핵심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땅에 이루어졌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계속하여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서 죽게 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한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을 향하여,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유대인이 죽게 한 예수를 메시야로 믿고 회개할 것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능력을 믿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었고, 그 말씀이 가진 능력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을 충만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지 않으면 주저하게 됩니다. 물건을 파는 세일즈맨이 자신이 팔 물건에 대하여 확신이 없으면 많이 팔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받을 이윤 때문에 어느 정도 물건을 팔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열심을 최대한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건을 직접 사용하고 좋은 것을 확신한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판매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틀려집니다. 그 물건이 좋은 것이고 필요하다는 확신과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후의 인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울의 인생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울을 통하여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역사합니다.
9~10절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3개월 동안 강론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강하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바울에 대하여 대적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말씀 선포를 방해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점차 강해지자 바울은 미련 없이 그 곳을 떠나 다른 장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도 있지만 거부하는 자도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예수님도 그곳을 떠나 다른 곳에서 전하셨고 또 제자들에게도 그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두 해 동안을 강론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변화된 사람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받고 체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고 그 말씀에 의하여 사람들이 변화되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실제로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한 2년여 동안의 사역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한 일곱 교회가 바로 이 사역의 결과로 탄생하였습니다. 골로새, 히에라볼리, 라오디게아에도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 태동된 교회는 그 후로도 수세기 동안 많은 일들을 하는 역동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40년 뒤에 트라얀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 미신의 폐풍은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시골과 마을 곳곳까지 휩쓸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게 뻗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료입니다. 이는 바울이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한 것입니다. 따라서 선교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이 주체이시고 사람은 단지 그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 받는 선한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져야 합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진정으로 경외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믿음으로 오늘도 선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는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자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능력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한 도구로 사용되는 바울에게 일어난 수많은 능력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에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나 단체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썩는 밀알처럼 희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희한한 능’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고 했습니다.
‘심지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행한 능력이 아주 뛰어나고 많았는데 ‘심지어’는 이러한 일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을 고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러한 것을 스스로 가져다가 행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바울의 치유를 간절히 기다리던 에베소 제자들이 은밀하게 이러한 행위를 했을 것입니다. 마치 열두 해를 혈루병을 가진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원했던 것처럼 너무나도 간절히 치료를 원한 나머지 이러한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 에베소의 사람들은 우상의 도시답게 이러한 이교 문화에 익숙하였습니다.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대부분 그들이 가진 소지품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 사용하던 물건이라 하더라도 그 물건 자체에서 능력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베소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이러한 어린 믿음에도 응답하셔서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바울의 복음 전파와 말씀 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선교 현장에는 이러한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곳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자신이 위대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러한 기적을 선교 외에 다른 목적으로 이용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은 그러한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대인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보통 이러한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이름을 빌어 악령을 물리치는 무당이라고 하며 솔로몬 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솔로몬의 이름으로 악한 영을 쫓아낸 귀신들이 다시는 들어오지 않자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차 아브라함과 같은 위대한 성경의 인물들을 사용하여 귀신을 축출하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에베소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고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울이 행하는 사역을 본 이후 너무나도 당연하게 바울의 이름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귀신을 쫓아내는 데에 사용된 이름은 자연스럽게 모든 축사자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스게와와 일곱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제사장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서 효과적인 비즈니스를 위해서 제사장의 가문이라고 사칭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도 아니면서 목사라고 사칭하면 좋은 점이 있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완전수인 일곱과 같은 수의 종교적인 아들들이 있으니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있어 보이는 조건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들도 당시 유행에 따라서 바울의 이름을 도용하여 귀신 축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15~16절에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누구냐?’고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라는 악령의 반문이었습니다. 그 악령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바울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도대체 그 이름을 들먹이는 너희는 누구냐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악령들이 두려워 떠는 것이며, 바울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 알고 있지만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스게와와 일곱 아들들이 예수님과 그 어떤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들에게 악령들이 굴복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세계입니다. 우리 육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그 무엇이 있기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배의 형식을 따라해도 이단은 이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예배에 예수님과 교통하는 아무런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자세도 그렇습니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순서에 따라 지나가고 있으면 예배하는 장소에는 있으나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악령들은 잘 알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악령들은 영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분명하게 꿰뚫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누구냐?’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네가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느냐? 이렇게 역공을 당하며 조롱당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철저하게 무장하지 않고 섣불리 이러한 영적 전쟁에 뛰어들면 승리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엄청난 조롱과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스게와와 일곱 아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둘 이상의 모두’를 말합니다. 무려 8명 혹은 그 이상이 귀신들린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여 도망하였습니다. 그것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옷이 찢겨짐으로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는 상태로 말입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은 스게와와 일곱 아들들이 그만큼 유명한 주술가였거나, 또는 이러한 소동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큰 사건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에베소에서 주 예수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17절에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라고 했습니다.
원문의 느낌을 살려 번역하면 ‘두려움이 유대인과 헬라인들 모두에게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놀랍고 특별한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으며, 의지했던 우상들을 섬기는 마술사들이 행하는 것과 차원이 틀립니다. 게다가 섣불리 그 이름을 도용하자 오히려 악령들에게 제압당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오로지 주 예수의 이름만 경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을 따라 가장 영향력 있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런 일을 한 사람들이 오히려 쫓겨나는 것을 보니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일을 버려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두란노 서원의 말씀 강론에 대한 관심은 점점 높아지게 되었고, 결국 그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엄청난 이적을 나타내었고, 그 이적은 다시금 말씀에 집중하게 하는 좋은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이단의 도시 에베소를 변화시켰습니다.
18절에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고하며”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두려워만 했다면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외하는 마음은 두려운 것과 다릅니다. 참된 진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지만 한걸음씩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란노 서원으로 찾아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자복하여’라는 말은 ‘이전의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청산하고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고백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한 일들을 마치 훈장처럼 쫙 얘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거기에는 미화가 들어가고 거짓이 들어가지만 여기에서처럼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고 진실하게 자복하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죄악된 삶을 반복하지 않는 진실된 성도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인 것입니다. 한국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평양 대부흥 운동이 바로 이러한 자복하는 회개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부흥의 역사는 바로 말씀 사경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이 진실된 회개를 토해내게 하며 그 회개가 엄청난 부흥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회개에 이어 집단적인 회개도 일어납니다.
19절에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고 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더 이상 예전의 삶을 살다가는 자신들도 스게와와 일곱 아들들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생활을 과감하게 청산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복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거짓된 삶을 유지하게 하는 ‘그 책’들을 모조리 태워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불사르니’라는 말은 계속하여 태웠다는 뜻입니다. 즉 그 책이 너무나 많아서 다 불사르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에베소에는 이러한 이교문화와 또 그와 관계된 주술책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운 책 값이 ‘은 오만’이라고 했습니다. 하루 임금을 5만원이라고 한다면 25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마술책들이 런던과 파리등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 책은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어 있는데 ‘에베소 스크립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은 책입니다. 하지만 그 책을 태우게 했던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며 전 세계에 수많은 영혼들에게 생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모든 사람이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재물이나 권력을 포기하게 만든 원동력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시온의 대로로 갈 수 있습니다. 형통한 길로 가게 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은 아무리 값지고 비싸도 다 불살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지하고 믿는 모든 것들을 불사르면 그제야 비로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거짓과 썩어질 것이 사라진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게 우리를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상처에 고름이 있을 때에 그 고름 위에 약을 바르지 않습니다. 고름을 다 짜낸 후에 약을 발라야 정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가치관과 재물이나 권력과 명예도 함께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한 능력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면 놀라운 능력이 생깁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20절에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했습니다.
저자 누가는 에베소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회개운동과 분서운동을 일으킨 힘이 ‘주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흥은 이벤트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흥은 재물이나 권력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행한 이적으로 부흥이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이적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루 하루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에 그 말씀의 힘이 큰 부흥의 역사를 가져온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후에 에베소는 수세기 동안 디모데, 사도 요한, 폴리갑, 이레니우스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의 사역지로서 소아시아의 기독교 부흥을 이끄는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정으로 겸손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자복하게 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적인 회개를 넘어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사용되는 교회가 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강력하게 임하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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