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27일 종교개혁 기념주일 설교
열왕기하 23:8-18
요시야 왕 때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여기서 발견된 율법책의 말씀을 인하여 요시야 왕의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된 개혁으로 인도합니다. 그 말씀으로 인하여 겸손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열왕기하 22:11절에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요시야 왕은 히스기야왕과 함께 유다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려고 노력하는 몇 안되는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런 칭찬받는 왕이지만 요시야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할 것이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이 사실은 요시야 왕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영적으로 올바르게 서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음에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서 그 조상 다윗의 길로 간 요시야 왕이었습니다. 젊은 혈기를 부리기도 하고 방탕한 길로 빠지기도 할 나이인 26살에도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며 옷을 찢는 회개를 할 만큼 영적으로 예민한 왕이었습니다.
그러한 회개 후에 요시야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은 당연히 그 말씀대로 지키며 순종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의 옷을 찢는 회개가 참된 회개인 것은 그 이후의 행적을 보아서 잘 알 수 있습니다. 23:1~3절을 보시면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요시야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주고 말합니다. 이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자’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시작됩니다. 그 내용을 보면 철저하고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철저하고도 완벽한 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이 요시야의 개혁이라고 불리우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혁을 요시야가 주도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개혁운동의 주도자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시야 시대에 유다의 진정한 개혁의 바람은 요시야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암울했던 중세기 1517년에 시작된 종교개혁을 이끈 사람이 누구입니까? 마틴 루터입니까? 아닙니다.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말씀이 루터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고, 순종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비텐베르그 성당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는 행동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 개혁인 것입니다. 요시야나 루터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온전히 순종할 때 참된 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시야와 루터를 통하여 개혁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실제로 루터는 결코 자신이 교회를 개혁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진리의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루터를 감동시키고 루터의 인생을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개혁주의 교회입니다. 이는 우리와 우리 교회가 개혁 신앙, 즉 종교 개혁자들이 추구했던 바른 신앙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과거 종교 개혁자들이 이루어 놓은 신앙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시야를 요시야 되게 하신, 루터를 루터 되게 하신 그 말씀의 주체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이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신앙의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매일 매순간마다 참 진리이신 그 분의 말씀으로 새롭게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말씀위에 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미 우리는 개혁자의 걸음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여 참된 개혁의 삶을 살아갔던 오늘 본문의 기록을 상고하여 오늘 우리도 참된 개혁의 걸음을 걸어가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개혁은 사람이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하십니다.
오늘 본문 앞선 1~7절에서 요시야 왕은 자신이 발견한 율법책을 모든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말씀에 순종하여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곳에 걸쳐 세워진 산당을 개혁하기 시작했습니다. 참된 개혁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8절에 “또 유다 각 성읍에서 모든 제사장을 불러오고 또 제사장이 분향 하던 산당을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더럽게 하고 또 성문의 산당들을 헐어 버렸으니 이 산당들은 부윤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편에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산당은 ‘높은 곳’이라는 문자적인 뜻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하는 핵심장소였습니다. 특히 가나안 정복시에 거주민들이 자신들의 신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산당이 ‘여호수아의 대문 어귀 곧 성문 왼편’에도 있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그만큼 종교적으로 타락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9절에 “산당의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단에 올라가지 못하고 다만 그 형제 중에서 무교병을 먹을 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산당의 제의를 집전하는 제사장들이 레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각기 형편에 따라 이방신들에게도 예배를 드릴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집전하였습니다. 즉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산당의 제사장이나 성전의 제사장들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토요일 날 이단의 모임에서 집회를 인도한 목사가 바로 다음날인 주일날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단이나 기독교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백성들은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산당의 제사장들을 모아서 ‘여호와의 단에’ 올라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즉 산당 제사장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행위 자체를 막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무교병’을 먹게는 해주었습니다.
이렇게 산당의 제사를 폐하고 산당을 척결한 요시야는 이어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몰록 제사를 근절시키고 각종 우상과 우상 제단을 파괴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11절에 “유다 열왕이 태양을 위하여 드린 말들을 제하여 버렸으니”라고 했습니다. 태양신 경배는 당시에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애굽에서 가장 오래되고 왕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유다 열왕이 태양신을 숭배하였다는 사실은 그만큼 역대 왕들이 타락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는 강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정치적인 입장에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전통이나 관례 혹은 실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과감하게 이를 개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그 어떤 이유를 달지 않았습니다. 참된 개혁자의 모습입니다.
12절에 “아하스의 다락지붕에 세운 단들과 므낫세가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세운 단들을 왕이 다 헐고”라고 했습니다. ‘아하스의 다락지붕’은 히스기야의 개혁시기에 제거되었다가 므낫세와 아몬에 의하여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이들은 거기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까지 이방인의 단을 세웠습니다. 여호와의 전에 이방신을 섬기는 산당이 제워진 것입니다. 요시야는 이것을 다 제거한 것입니다. 다시 세우거나 사용할 수 없도록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그 가루를 기드론 시내에 부어버렸습니다.
13절에 “예루살렘 앞 멸망산 우편에 세운 산당을 더럽게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멸망산’은 신약 시대에 ‘감람산’으로 불리워진 산입니다. 여기에 솔로몬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우상 숭배에 빠져 각종 이방 신전들을 세웠습니다. 아스다롯과 그모스와 밀곰을 숭배하는 신전들입니다. 요시야는 그 석상들을 깨트리고 그 자리에 사람의 해골을 채웠습니다. 죽은 자의 시신이 닿으면 부정한 것인데 아예 해골로 채웠으니 다시는 그곳에서 종교 의식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헐었습니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왕입니다. 지금까지 남 유다의 왕들이 세운 우상과 신전을 개혁한 요시야는 그 범위를 넓혀서 북 이스라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자신을 개혁하고 예루살렘에서 남 유대와 북 이스라엘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미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개혁하겠다는 것은 앗수르와의 정치적인 마찰도 불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벧엘이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벧엘이 남 유다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훗날에 미칠 악영향을 미리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적 마찰에도 불구하고 그곳까지 과감하게 개혁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개혁을 요시야왕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행한 일만 보아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요시야왕의 이러한 개혁이 이미 300년 전에 예언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열왕기상 13:1~2절에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레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 시기를 절기로 정하여 제사하였습니다. 이는 명백히 여호와의 명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300년 후에 요시야로 인하여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16절에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입니다. 그러니 지금 요시야가 하는 종교 개혁이 요시야에 의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그러니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루터가 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섭리하신 것임이 명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 개혁주일에 루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루터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주권을 기억하고 그 분의 역사를 보아야 합니다. 요시야나 루터나 자신이 개혁을 한다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특별하게 자신이 쓰임을 받아서 이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와 세상을 개혁한다고 스스로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신이 가짜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입니다. 개혁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개혁자임을 주장한다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는 오만하고 무지한 자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개혁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자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명하시는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하여 죄인에서 의인이 되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며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당신의 개혁에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고 순종하면 그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당신의 개혁에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개혁은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고, 여기 저기 사람을 모아서 조직하며 선동하여 호소하고, 자신의 잣대를 내세워 누구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과 이름을 위한 작업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한 거짓입니다. 절대로 속으면 안 됩니다. 개혁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2. 개혁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은 자신의 개혁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알게 하였습니다.
17절에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정치적 마찰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던 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300년 전에 하나님의 사람에 의하여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하나님께서 요시야를 보내셨으며, 하나님께서 율법책을 발견케 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요시야로 하여금 벧엘에까지 오게 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요시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예민하여졌습니다. 영적으로 바른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18절에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전한 사자의 뼈를 예우함과 동시에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와 예언의 성취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를 좋아합니다.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기를 원합니다. 통일 한국의 위대한 업적을 이룬 정치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성도에게 어떤 이름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기를 바라십니다. 지금 요시야는 정확하게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여기까지 와서 그 예언을 전하고 죽은 선지자의 묘를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기념하는 것은 그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요시야를 통하여 성취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개혁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도 그렇지만 496년 전 당시 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타락의 극치를 보여 주었습니다. 정규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돈을 주고 사서 목사 노릇을 합니다. 지방 군주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타협하고 함께 결탁하여 백성들을 현혹시킵니다. 심지어는 성경에도 없는 말들을 지어내어 사기를 칩니다. 하나님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뒤로 하는 사악한 무리들이 된 것입니다. 당연히 개혁되어야 합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 되어야 합니다. 본래 개혁(改革)이란 말은 ‘기존 질서의 타당성을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고 다만 그 본래로 되돌아가는 갱신(更新)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이란 말은 혁명이란 말과 구별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으로의 환원운동이었습니다. 교회 본래의 모습으로 환원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사도적(使徒的) 신앙으로의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되돌아가자는 환원운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사로잡힌 루터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칼빈을 비롯한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 원리는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님께만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혁의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의 모습대로 만들지 않고 나를 위해, 내 만족을 위해, 내 편리를 위해 이용하거나, 조정하려고 하는 순간이 바로 개혁의 대상이 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분노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어리석은 모습으로 성전에서 안주하는 유대인들의 성전을 허신 것입니다. 모태 신앙으로 안주해 있는 우리의 신앙을 허십니다.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로 마치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을 허십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불의한 생각을 허십니다. 예수 믿으니 복 받을 것이라는 기복주의 신앙을 오늘도 허무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말씀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여러분 각 개인에게 과연 어떤 의미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까?
단순히 예배드릴 때 필요한 기록된 책에 불과합니까?
단순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교양을 위해서도 한번쯤 읽어 보아야 할 책입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대하고 있는 이 66권 성경은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책의 말씀은 우리 깊숙한 곳에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서 회개하게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말씀은 통회하고 자복하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용기를 주어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법도에 순종하게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말씀은 우리의 자아를 죽이고 우리의 의지를 죽이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라 참 진리의 걸음을 걸어가게 하여서 마침내 이 세상을 개혁하는 개혁자의 걸음을 걷게 하는 책입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의 다함이 없는 풍성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위로 교통 내주하심의 역사가 진정한 개혁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그 개혁에 사용되는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자임을 깨닫고 오늘도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아 참된 개혁의 걸음을 걸어가기로 결심하는 경향의 성도들 머리위에 그 받을 축복의 기업위에, 함께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 머리위에
이 진리의 말씀에 오늘도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시어서 마침내 온 세상을 향하여 개혁의 걸음을 걸어가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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