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1일 주일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15-21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죽어서 가죽을 남겨 세상에 이익을 주는데 하물며 사람은 더 훌륭한 일을 하며 살아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뜻의 속담입니다. 그런데 신자에게는 이 말이 조금 다르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신자는 죽어서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남겨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면 그것은 틀린 삶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죽어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높아집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잘 알고 있지만 그 곳에서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한 소년의 이름은 모릅니다. 그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는 작은 희생이 되었습니다. 사실 오병이어라는 크고 놀라운 기적 앞에 그 소년은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내 도시락이 사용되었다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나의 도시락이 아니었다면 그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없었다고까지 떠벌리고 다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간증 집회도 인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우리는 그 소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소년의 이름을 모릅니다. 이는 그 소년이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년의 이름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소년이 행한 일을 하나님께서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위하여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이용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합니다. 내 청춘을, 내 열정을, 내 젊은 날을, 내 모든 것을 교회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바쳤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의를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이 알아주어야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마저 자신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여 의를 얻으려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자신의 의와 희생을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고 화를 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에게까지 항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매여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저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공로주의, 율법주의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서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으로 경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믿음으로 가능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죄인인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은 나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 주어진 한시적인 시간 동안에 나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존귀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북한은 지금 분명한 독재국가이며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고,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 현재 북한의 고위 공직자라고 한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체제에서 살던 사람이며, 그 체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가 유대인입니다. 그것도 아주 골수 유대인입니다. 심지어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던 사람을 체포하고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굉장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에 해당되는 사람은 바울과 베드로 및 모든 유대인 개종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자들입니다. 이방죄인과 구별되어 할례와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선민의식으로 살았던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고백하니 아직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유대인들과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고백은 아주 분명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6절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 복음의 핵심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즉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제 아무리 발버둥치고 살아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죽인 살인자는 멀리 도망가서 아무리 의롭고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도 그 죄가 탕감 받지 못합니다. 사기치고 도적질한 사람은 그 돈으로 많은 돈을 벌어서 그 사람들에게 사기치고 훔친 돈의 열배 백배를 갚아도 그 행위로 인하여 법적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듯이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은 절대로 스스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살면서 무수히 많은 자범죄를 저지르고 살아가는 우리는 아무리 애를 쓰고, 도를 닦고, 고행을 해도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총칭되는 모든 일들을 아무리 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될 수가 없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성경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발 이 말을 듣고 자신을 겸손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일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의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부정하면 절대로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막대한 재물이나 강력한 권력, 모두가 칭송하는 명예로운 삶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선민의식을 갖고 태어난 우리 ‘본래 유대인’들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본래 유대인’이라고 해서 자랑하거나 안심할 것도 없고, ‘이방 죄인’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즉 모든 인류는 의롭게 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며 완전합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라고 해도 엘리베이터만 있는 곳은 없습니다. 항상 계단이 존재합니다. 정전이 된다거나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화재가 발생하면 계단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엘리베이터와 함께 계단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고층 건물에서 사람들이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비상시에만 계단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만 있는 건물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자들이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엘리베이터로 율법을 계단으로 생각하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율법을 버렸는데 막상 심판 날에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 의심하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하여 발명되고 유지되며 진보하는 문명은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무장된 최첨단 엘리베이터가 있어도 계단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인한 구원은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완전하고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17절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은 선민인 유대인으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할례와 율법주의를 버렸는데 그 결과 마지막에 율법이 없는 이방 죄인들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선민 유대인으로 가지는 모든 종류의 특권과 율법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고 다 버렸다가 할례와 율법이 없는 ‘이방 죄인’처럼 되어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는 불안과 의심의 목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잘 따르고 준행하는 유대인들을 타락하게 만들어서 이방인들과 같이 만드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을 죄인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선명이나 이만희와 같은 사이비 교주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죄의 조성자가 되실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역시 율법적인 시각에서는 죄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인이 될 수 없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죄인은 율법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확고히 믿는 우리가 아니라 이처럼 의심과 불안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렸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18절에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헐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폐하였던 할례를 비롯한 모든 율법주의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앞서 말한 의심과 불안으로 ‘다시 세우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닌 할례를 받고, 각종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를 쓴다면 ‘범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범법한 자’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서 죄를 지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 즉 율법에 의하여 거룩하고 의로운 행위가 되며 그로 인하여 의인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진정한 범죄라는 말입니다. 한 평생 남을 위해서 살며, 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성자처럼 살면서 그 행위로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께 범죄 하는 자가 됩니다. 저들의 의로운 말이나 행위에 속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는 구원으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완전한 길이며, 충분한 길입니다. 율법주의, 공로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은 범법자가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율법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대한 집착이나 율법의 각종 조항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즉 바울을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율법과 완전히 끊어진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자가 은혜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러한 죄를 짓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 위하여서는 율법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과의 관계를 정리한 사람은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분명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체적으로 일어난 그 사건이 바울에게 지금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도 바울을 율법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율법주의와 죄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입은 바울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신을 위하여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정욕으로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인생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십자가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세속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나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닌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변화로 인하여 사울은 더 이상 핍박자요 잔해자가 될 수 없고 바울로 변화 되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그 날이 이르기까지 우리 그리스도인이 잠시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 육체를 통하여 사는 삶은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세상에서 육체로 살아가면서 받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시험이 몰아쳐도 쓰러지거나 절망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권력이나 명예가 있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잠시 머무는 이 세상이 영원한 줄 알거나, 영원한 천국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가지만 우리 신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늘 기쁘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비록 아골 골짝 빈들에서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지만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늘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결단코 그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습니다.
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앞선 18절에서 기록되었듯이 율법주의에 굴복하여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참한 죽음을 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율법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율법주의와 공로주의에 대하여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경건하게 살면, 조금 더 거룩하게 살면, 믿음을 가지고 또한 율법도 지키면서 살면 구원에 있어서 굉장한 도움이 되거나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행위에서 자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더 이상 구원에 이르는 행위는 필요 없습니다. 의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불안해 하지도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자유함 속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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