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6일 주일예배 설교
고후 2:5-11 (2 Corinthians 2:5-11)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있다면 바로 용서일 것입니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단의 무리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합니다. 자신들은 추천서가 있지만 바울은 추천서가 없는 것을 들어 바울에게는 사도권이 없다는 사도적 권위에 대한 무시와 훼손으로 고린도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교회가 징계하도록 바울이 권면하였고 그 권면을 고린도 교회가 받아들여 범죄자들을 징계했습니다. 그렇게 징계를 받은 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근신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의 악화된 상황이 원만하게 수습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징계를 받은 자들을 용서하며 위로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 거룩성과 순수성을 유지하게 됩니다. 정당한 권징이 시행되고 그러한 권징을 통하여 죄 지은 자가 깨닫고 회개하여 다시금 돌이키는 일이 일어나고, 그들을 향하여 용서하고 위로하여 다시금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서게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단체입니다. 개인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서 모인 단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모든 면에서 다른 세상의 단체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용서와 위로는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함으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용서하고 위로함으로 회복케 되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써서 저들을 용서하고 위로할 것을 권면합니다. 비록 저들이 교회를 혼란에 빠트리는 죄를 범하였지만 이제는 그 죄를 회개하고 근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절에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찌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공격함으로 바울에게 상처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들이 자신에게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의 무리들에게 ‘어느 정도’의 근심만 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죄를 지은 자에 대한 배려입니다. 저들도 교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저들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 지은 자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있기에 나오는 표현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징계는 사랑하는 가족의 징계이지 학교나 국가에서 행하는 징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6절에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받은 것이 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공격을 가한 자들은 고린도 교회 구성원들의 다수에 의하여 ‘벌’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이들에 대한 징계가 만장일치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소수의 어떤 무리들은 더 엄한 중징계를 주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무리들은 다른 주장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족하도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더 이상의 중징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저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가 아닙니다. 저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뉘우침을 보였고 근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용서는 진정한 회개와 반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성하고 뉘우치는 자들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의 징계는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저들에 대한 더 이상의 징계나 벌을 가하기 보다는 ‘반대로’ 용서하로 위로하라는 바울의 직접적인 권면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으나 원문에는 ‘반대로’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범죄자에 대한 고린도 교인들의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징계에서 용서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비난하지 말고 위로하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켰으니 그러하라는 말입니다.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킨 사람들이 갈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더 많은 근심을 하는 것을 염려하는 사도 바울의 진정성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죄인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비록 다시금 같은 잘못을 저지른다 하여도 그 당시는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을 동일하게 반복하여 범죄하고 있습니까! 연약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다짐하고 또 결심하지만 너무나도 쉽게 또 범죄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시고 자비로우신 사랑하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죄를 또 저지르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를 또 저지를 것을 아시고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와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회개를 믿어 주시고 인정 하셔서 두 번째 기회를 또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8절에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사랑’을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징계한 자들을 이제는 교회의 일원으로 다시금 받아들여서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라는 말입니다. 공식적으로 결의하는 절차를 통하여 성도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의 사랑을 확실하게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나는 저들을 향하여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저들을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시며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계시는데 정작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한 마음으로 저들을 미워하며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수한 잘못을 반복하면서도 또다시 용서함을 받고 회복하는 은혜를 입었는데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는 전혀 그러한 용서와 위로를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보다 더 모순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앞에서 공적인 잘못을 통하여 징계를 받은 자들도 자복하고 뉘우치면 용서하고 위로하며 사랑을 나타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간의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문제나 실수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저들이 또 그러한 잘못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오히려 저들의 연약한 심성을 위하여 위로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미 그러한 사랑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2. 용서하고 위로함으로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 사람을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하는 몸 된 교회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과 참된 관계를 나누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실로도 우리는 올바른 위치에 서있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잘못이 없고 옳다고 생각해도 회개하고 자복하는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납하지 못하는 그 사실이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어퓨굿맨’이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습니다.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쿠바와 대치하는 최전선의 해병대에서 한 병사가 선임병들의 폭행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최고책임자의 명령이기 때문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그 선임병들은 유죄가 됩니다.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왜 유죄냐는 항변에 ‘피해자와 같은 약자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주어집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인의 신분이지만 그 명령에 앞서 진심으로 자신의 후임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에 우선하는 가치가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신 그 놀랍고 신비한 사랑에 기초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징계를 해도 사랑에 근거하여 징계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금 용납하여 원래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을지 모르나 이미 가장 중요한 사랑의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러한 사랑에 근거하여 사랑과 용서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는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9절에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한 사도 바울의 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그저 자신의 말에 대한 순종 여부를 알기 위하여 그들을 징계하라고 했다가, 그들을 다시 사랑하고 용납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자신의 말에 잘 따르는지를 알기 위하여서 이러한 징계와 용서를 명령했다면 사도 바울은 교권주의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말 한마디로 교회의 정치가 좌우되는 것으로 권위를 세우고, 교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편지를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 바울은 사라지고 주님께서 세우신 사도로서의 권위가 세워짐으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말 한마디에 교회의 행정이 좌우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는 것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모든 과정에서 사도 바울이 아닌 인간 바울의 의도가 조금이라도 들어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서신을 읽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적인 의도를 완전히 멸절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서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을 수 있으며, 은혜를 받는 것은 이러한 모든 일들 가운데에서 인간 바울의 의도는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세우신 사도로서의 권위만 나타내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도 바울의 권면에 전적으로 순종한 고린도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덕을 세우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각기 저마다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의 생각과 위치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곳에 맡긴 직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의 의도와 은총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생각과 필요에 의하여 그 직분을 만홀히 여기거나 혹은 남용한다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공격을 한 자들을 용서했습니다. 물론 자신이 가진 권위로 그들을 출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게는 저들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앞에서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예의적인 차원에서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용서는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차원에서의 용서가 아닙니다. 그 용서는 ‘그리스도 앞에서’ 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도망가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주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놀라운 사랑의 십자가 앞에서 과연 우리는 누구를 정죄하며 배척할 수 있습니까? 지금 바울은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용서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신 십자가 앞에서 다른 어떠한 논리와 이유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골로새서 3:13절에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됩니다. 사도 바울은 위대한 사람이니까 되고 나는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래 죄인인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인하여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십자가 사랑 앞에서 모두를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이유나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유로 인하여 용서하기를 거절하면 그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궤계에 빠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아주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서 용서하지 못하는 핑계로 정당화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사단의 책략에 빠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확인 되지 않은 사실을 듣고 그 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은 우리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나를 향하여 뺨을 때리고 모욕하며 침 뱉어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수군대는 것은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이는 명백하게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 하나됨을 깨트리는 사단의 궤계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단은 죄 지은 자를 정죄함으로 교회를 분열시키려고 합니다. 그럼으로 실수하고 죄를 범한 개인을 낙심케 하고 좌절하게 하여 영적인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은 참소하는 자이며 속이는 자입니다. 거짓말로 수군대고,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넘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무기를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기쁘게 하는지를 우리가 잘 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사단의 궤계를 물리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용서와 위로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용납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형제가 주 안에서 진실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실천하는 우리들은 악한 마귀 사단의 궤계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도를 세우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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