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23일 주일예배 설교
마태복음 12:14-21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본래대로 회복시켜주심으로 인하여 많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메시야의 길을 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회복의 역사를 많은 사람들이 왜곡하고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병 고치는 의사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압제에 신음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려는 정치가로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즉 예수님이 바로 복음 그 자체입니다. 단지 이러한 본질적인 일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러 가시는 곳 마다 병든 자나 가난한 자, 억눌리고 죽게 된 자들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본래의 사역은 외면하고 오로지 병 고치고, 복 받고, 해방되려고하는 부수적인 일에만 열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참된 메시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때가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할 의도가 전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관심으로 인하여 메시야로서 본질적인 사역에 많은 제약이 가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병든 자를 회복시켜 주시거나,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면서도 이를 주변에 나타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건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안식일에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질문하였습니다. 이는 명백한 의도가 있는 질문입니다. 즉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흠을 잡아서 고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양이 구덩이에 빠지면 비록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건져내는 것이 죄가 아니라는 예를 드시면서 ‘사람이 양보다 귀하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대답을 하시고 손이 마른 사람을 본래대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대답과 병 고침은 바리새인들에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가진 권위와 진리의 말씀이 가진 분명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의논하였습니다.
14절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되어서 또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는 것은 대단히 큰 분노와 적대감이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죽일까 의논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고, 회의를 열며, 상의한 것입니다. 동일한 기사를 기록한 마가복음 3:6절에 보면 ‘헤롯당과 함께’ 의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자신들과 사상이 다른 헤롯당과 연합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이러한 음모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휘말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본래의 사역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떠나신 것입니다.
15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래의 사역을 위하여 그 자리를 떠나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쓸데없는 감정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싸우고 힘을 낭비하여 정작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욕하고 조롱하고 비판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복수를 하려고 분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열정과 힘으로 각자의 선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바리새인을 피하여 떠나신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갔습니다. 손 마른 사람을 말씀으로 치유하신 놀라운 이적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거나 가르침을 얻기 위하여서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의 육신을 괴롭히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이 아닌 이유로 인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언젠가는 다시 예수님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항상 복음의 본질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하고 전하면 참된 신자의 길을 가지 못하고 결국에는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복음을 인함이 아니라 병 고침과 같은 이적 때문임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병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사역으로 인하여 저들에게 복된 말씀을 들려주는 계기로 삼으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해와 핍박이 있는 곳을 잠시 떠나시는 것이지 사역의 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떠한 핍박과 어려움이 있어도 본질적인 사역을 중단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하여 구제하고 치유하는 행동도 중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로 인하여 아무런 열매가 없거나 혹은 손해를 본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한국에서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학교와 병원도 세웠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익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물과 시간과 인력에 있어서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선한 일로 인하여서 한국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만천하에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선교사는 학교나 병원을 지어주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이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이나 공산권 지역에서 그러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선교하기 위하여 학교를 지어주고, 병원도 세우지만 이를 완공하고 뭔가 복음적인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저들의 교묘한 방해 공작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추방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할 때에는 지혜롭고 조용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해만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말씀도 전하셨지만 자신의 병 고침과 같은 이적에 대하여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복음 사역에 지장이 오기 때문입니다.
16절에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업을 잠시 중단하더라도 각종 홍보나 후원회에 참석하여 자신과 단체의 업적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기가 아닌데 자신을 드러내면 정작 해야 할 메시야적인 사역에 지장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치적을 드러내려는 교만이나 허영심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어 말씀을 듣도록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완벽한 계획으로 인하여 구속사역에 아무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복음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각종 표적과 기사만 행하는 자로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자와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선행이나 돌봄도 그렇습니다. 이를 드러낼 경우 악의를 가지고 이용을 당하거나, 혹은 시기 질투로 말미암아 쓸데없는 오해를 받게 됩니다. 또한 많은 칭찬과 격려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질 우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와 교회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 조용하게 그러나 견고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핍박하고 조롱해도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나타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는 사역입니다.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7절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라고 했고, 21절 하반절에 “…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한글 성경에는 나뉘어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는 17절 말씀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의 탄생을 포함하여 신약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는 분명한 증거의 말씀입니다. 즉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사역하시는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나의 택한 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완벽하게 이루는 순종하는 종의 신분이기도 하시면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라고 하시는 표현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해주고 돌봐 주어도 부모의 기대와는 반대로 속 썩이고 자기 멋대로 하며 그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녀를 보면 참 화가 납니다. 사랑하고 이해도 되지만 결국 불순종하고 나쁜 길로 가는 것을 보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내 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사랑하는 자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며 항상 그 마음을 헤아리려는 자녀를 보면 진심으로 기뻐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택한 종이며 사랑하는 자라고 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서로를 기뻐하며 순종하는 완벽하고 아름다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성을 이해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일이 분명하게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성령을 주십니다. 이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던 사건으로 인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이행하십니다.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판’은 ‘정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 자체로 ‘복음’이 되어서 온 세상 만민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선포는 크게 드러내지 않고 조용한 가운데 진행이 되었습니다.
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의 동사를 두 번이나 연달아 반복한 것은 그만큼 강조하는 것입니다. 앞서서 말한 메시야의 사역이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완수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논쟁하거나 여기 저기 떠들고 광고하면서 세력을 과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유명해지고, 조금만 실력이 있으면 과장하고 자랑하기 바쁩니다. 그런데 정작 이 세상의 주관자 되시며 모든 것의 창조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그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할’정도로 말입니다.
이처럼 메시야의 사역은 겸손과 온유함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논쟁은 했으나 감정적으로 싸우거나 다투시지 않으셨습니다.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면 본문처럼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저들이 모르거나 악한 사단의 조종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조용하게 사역을 하셨을까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진정한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소멸시켜 버릴 힘과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여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것은 본인의 뜻도 아니며, 하나님의 뜻도 아닙니다. 자신의 자녀를 상대로 게임을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는 부모가 없듯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겸손하고 온유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이어지는 20절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상한 갈대’는 썩어서 부서진 갈대를 말합니다. 꺾지 않고 그대로 놔두어도 되살아날 가망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꺼져 가는 심지’는 말 그대로 연기가 나는 심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이 꺼져서 그 자체로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죄로 인하여 죽은 인간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한 갈대를 꺾어 버리는 것과 꺼져가는 심지를 끄는 것은 너무나도 잔인한 행위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 하거나 그대로 두지 않고 확인 사살하는 것처럼 극악무도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건지시고 영원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시며,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되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한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셔서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미 주어진 각본에 맞추어서 좋은 배우가 완벽하게 연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것이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타락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놀라운 사역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진행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예언의 성취를 응하게 하심이 마치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완벽한 각본에 맞추기 위하여 조용한 사역을 하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그 때 그 때 생겨지거나 수정되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이미 계획되었고, 예정되어진 것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약의 예언을 응하게 하심이라’는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서서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바라다’는 말은 희망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방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한 구원을 소망하고 있으며 이를 이루시는 사역을 완성하신다는 예언입니다. 이미 구약 성경에서 이방인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유대인만이 특별한 선민이라는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유대 민족은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표본으로서 선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선민의식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해야 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감사해야 합니다. 또한 이방인들도 유대인을 향하여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그들에게 먼저 주어진 기회를 인정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사역의 범위가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서로를 미워하고 자신만 특별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방인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방인의 소망이 되고 있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오늘날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오로지 예수님만이 희망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며 물고 물리는 현실에서 그 어떤 정치나 외교, 민간의 노력이 중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힘과 모략으로 남을 짓밟아서 올라가려고만 합니다. 이들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마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정의와 공평을 외치고 있지만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과 족속에게 진정한 공의와 평안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짜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부터 계획된 사역을 온전하게 이루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때까지 온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모든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창세전부터 계셔서 창조사역을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약 성경의 예언을 완전하게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유대인을 넘어 모든 이방인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죄인에서 의인으로 신분이 변경된 우리 신자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방황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믿고 따르며 전파하는 주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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