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역사하는 말씀

Posted on 06 Oct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10월 6일 주일예배 설교
데살로니가전서 2:13-16

성도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탄 자동차가 주행 중에 별다른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까지 드러난 통계에 의한 불완전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고속도로에서 달릴 때에 일말의 불안감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이나 건물에서 거주하면서 그것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도 지금까지의 통계와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단 한순간이라도 완전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어디에도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우주에 있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행성들이 지구를 스쳐 지나가기만해도 우리가 이루어놓은 안전은 거의 사라지게 됩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활동하게 되면 온 인류가 순식간에 괴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거나 애써 외면하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은 결코 안전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통제하여 주시는 은혜 속에 살아가는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 겸손한 사람은 이러한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즉 예수를 믿는 신자는 이 위험한 세상에서 어디가 안전한 장소인가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께서 허락하시는 순간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믿고 그 분이 주시는 사명만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날마다 먹을 것, 입을 것, 안전한 곳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믿음가운데에 이루어지는 은총을 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서 바로 이러한 믿음을 보았기 때문에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여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전도자를 통한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을 때에 큰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가장 먼서 사람을 통하여 전달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역자들이 쉬지 않고 감사하는 복된 존재들이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사역자들에게 근심과 염려거리가 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역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앞선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서 참 많은 은혜가 서로에게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그 교회의 사역자들과 교인들이 서로에게 늘 감사와 기쁨이 되는 것은 정말로 은혜가 되는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사역자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진리의 복음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하여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사도들의 외모와 성품에는 비록 흠과 티가 있어도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전하여지는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겸손히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성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중계자에 불과합니다. 또 상세하게 풀어서 말해주는 해설자입니다. 각종 스포츠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단순히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방송을 외면하고 시청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그 경기의 소중한 순간을 함께 할 수 없는 불이익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사역자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반드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받다’는 말이 두 번나오지만 원어에는 그 동사가 각각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에’의 ‘받다’는 객관적이고 외부적인 들음을 의미합니다. 귀가 있으니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들리는 소리이며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라고 할 때의 ‘받다’는 단어는 그 말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의 말씀이 ‘객관적으로’ 들려집니다. 문자로 기록되어있으니 글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내용을 읽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씀을 명백하게 ‘주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은혜를 받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로 인하여 객관적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주관적인 은총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지금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설교였기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까? 뛰어난 언변과 화려한 수사가 있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0:10절에 보시면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즉 전하는 자의 신분이나 능력이나 성품에 따라 차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한 자세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니 저들의 믿음 안에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죄악에서 둔감하여진 우리를 깨우고 예민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놀리고 이용하였는데 이제는 저들도 하나님의 귀한 영혼임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얼마나 교만하였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성도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오로지 복음만을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역사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역사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실 때에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게 되면 반드시 그 삶이 변합니다. 강단을 통하여 전해지는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 전하는 자의 외모나 말투나 방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임을 깨닫고 집중하여 받게 되면 그 믿음 안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음성이기 때문에 더 은혜를 받고 지금은 그러한 사도들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가 덜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목사이며 화려한 언변이 있는 설교이기 때문에 은혜가 있고, 아무도 모르는 목사의 어눌하고 투박한 설교이기 때문에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주관적인 태도로 받을 때에 그 말씀의 역사가 지금도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필연적으로 이 세상에서 고난을 수반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군인이 북한지역에서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으면 편하겠습니까? 죽음의 위협가운데 있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적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우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군복을 입고 싸우려하는 군인을 핍박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난이 신자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14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진리의 길을 가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과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일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길로 가게 하였는데 저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하지 않습니다. 동일하게 진리의 길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하게 되면 우리 선진들이 갔던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고난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유대에 있는 교회와 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저들이 받은 고난을 동일하게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대접을 받고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제자들도 모두 핍박과 고난 속에서 순교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동일한 길을 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러한 핍박과 고난이 없으면 우리는 잘못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 평탄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아무런 고민도 없이 사람들에게 존경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와 상관없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는 삶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인간의 말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고난도 없고 핍박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 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자기편을 향하여 핍박하고 고난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유대에 있는 교회들과 똑같은 고난과 핍박을 받은 것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이 설명하며 격려하고 인내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동일하게 이 원리는 적용됩니다. 우리가 전도자를 통하여 선포되는 사람의 말을 객관적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주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고 고난을 받고 핍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니 이상히 여기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더욱 기도하며 인내하여 진리 안에 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어떠한 고난도 능히 이겨내는 큰 은혜가 있습니다.

비록 성도에게 고난과 핍박이 있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떠한 고난도 반드시 이겨내는 큰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15절에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므낫세 왕의 통치하에서 톱으로 몸이 두 조각나서 죽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굽에 함께 내려갔던 동료 유대인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죽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쫓아내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대적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일에 대하여 정면에서 방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에 대하여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16절에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금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일을 유대인들이 막았다는 말입니다. 적극적으로 방해했습니다.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라고 했습니다. 쉬지 않고 항상 죄악된 일을 행합니다. 마치 자신들에게 할당된 죄악의 분량이 있기라도 하듯이 죄악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가리켜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경쟁적으로 죄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까지 행했습니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죄악된 분량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지기까지 차고 넘치기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세상이 불의하고 악한 자들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까지 자신의 죄악된 분량을 채우고 있습니다. 영적이고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악한 자들의 행위가 보입니다. 또한 그 분량이 찰 때까지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신 하나님의 음성 ‘오직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대답으로 충분합니다. 악한 자들의 성공과 우리를 향하여 오는 핍박으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조급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죄악이 차고 넘치기까지 우리는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로 살아갈 때에 이 세상에서 오는 어떠한 시험과 환난도 능히 이기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인 전도와 선교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향한 극심한 핍박으로 인하여 교회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인근 각지로 흩어져서 그곳에서 교회를 세우고 더욱 큰 일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죄인은 자기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악을 선으로 바꾸어서 더욱 큰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떠한 고난과 핍박도 능히 이겨내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사람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하는 말로 받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저들에게 닥친 모진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도 능히 이겨내는 축복도 받았습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역사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오늘 말씀의 본질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과 환경으로 인하여 본질을 잊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를 어떠한 환경에서도 선한 길,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비록 고난과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맛보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진 환경을 탓하며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주신 사명을 위하여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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