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일 주일예배 설교
요엘 2:18-27
요엘 선지자가 활동할 시대의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뉘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국가로서의 거룩하고 정결한 신앙생활의 모습이 거의 사라지고 각종 우상숭배로 인한 타락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 중 전통적인 강대국 애굽의 영향력이 서서히 확장되고 블레셋, 에돔 등과 같은 나라가 이스라엘과 함께 서로 견제하면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의 순수성을 지키기 보다는 주변 국가들과 연합 및 외교적 관계등을 통하여 유일신이 아닌 다신론을 받아들이게 되고, 거룩이 아닌 세속적 흐름을 인정하게 되어 선민의 나라가 아닌 세상 나라 중 하나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갑자기 메뚜기 대재앙이 남 유다 온 땅을 휩쓸고 지나가 전 국토가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까지 겹쳐서 모든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이것은 그저 우연한 자연 재해일 뿐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이며 우리는 완전히 망할 것이라고 절망하였습니다. 이렇게 국론이 분열되고 서로 그 원인을 몰라 우왕자왕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 메뚜기 재앙은 단순한 자연 재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보이시는 초자연적인 징조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 장차 다가올 ‘여호와의 날’에 대한 예시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선민은 이러한 재앙을 통하여서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함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여호와의 날’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종말의 날을 말하는 것이지만 또한 그 ‘여호와의 날’은 또한 선민 구원의 역사에서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는 중요한 날을 말하기도 하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선민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의하여 무너진 날, 마카비에 의한 유다 독립 전쟁의 날, 신ㆍ구약 시대를 가르는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날도 ‘여호와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엘서를 비롯한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에 이러한 복합적이고도 다양한 배경을 생각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즉 주어진 본문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 어떤 사건을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함과 동시에 그 본문을 읽고 있는 전혀 다른 시대의 독자들과 상황들에 대해서도 주어진 메시지가 있음을 함께 상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거나 반대의 길을 가게 됩니다. 역사상의 이단이나 오늘 날 쉽게 볼 수 있는 이단들이 바로 이렇게 성경의 메시지를 하나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오늘 본문이 기록된 요엘서는 단순히 앗수르와 바벨론 등의 대제국에 의하여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되는 ‘여호와의 날’이 다가오고 있으니 그 시대의 선민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나서 한 시대를 살다가 죽는 모든 인생들에게 자신들이 살아가는 그 시대와 그 공간만을 생각하지 말고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창조주이시며 절대자이신 여호와께서 온 우주와 역사를 어떻게 통치하시는지를 깨닫고, 자신의 인생과 그 시대를 뛰어 넘어 하나님의 나라와 구속의 역사, 그리고 종말론적인 심판이 이루어지는 ‘여호와의 날’과 그 이후에 도래하는 영원한 그 나라에 대하여 생각하며 살아감으로써 성도의 참된 길을 걸어가는 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날 무수히 쏟아지는 이 세상 지식과 처세 방법들의 홍수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성경 말씀이 제시하고 있는 위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악한 길이 아닌 선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잠시 주어진 세상 역사의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나는 ‘여호와의 날’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무수히 만나는 ‘여호와의 날’, 개인의 삶 속에서 무수히 만나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을 보고 놀라운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제시하는 본문의 선포를 통하여 지금 이 시대와 개인에게 닥칠 ‘여호와의 날’에 행하여지는 ‘큰 일’을 통하여 위로와 도전이 되며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다시금 확인하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셔서 그 악한 대적을 쫓아내십니다.
선민으로서 선민답지 않게 살아감으로 메뚜기 재앙과 극심한 가뭄을 통하여 황폐해진 땅에 여호와의 긍휼하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보시고 회복시키시는 은총의 말씀입니다.
18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중심이 뜨거우시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땅이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실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내 자녀가 잘못을 하여 벌을 받는 다고 하더라도 정작 그 벌을 받는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볼 때에 너무나도 가슴 아픈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는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다시금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일을 또 다시 당하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 때에’라고 했습니다.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앞선 12~13절에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처럼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바로 ‘그 때에’ 여호와께서 긍휼을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거룩하고 완전한 삶을 지향하여 살아가다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그 즉시 자신의 부족함과 교만함을 인정하고 하늘의 하나님께 진실한 회개를 통하여 용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부르짖음을 듣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19절에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인하여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응답하여’라고 했습니다. 목소리가 커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만나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회개와 겸비한 자세로 부르짖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 응답은 회복입니다. ‘흡족하리라’고 했습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요엘서 1장 4절에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7절에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10절에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흡족하도록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정도면 살 수 있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포만감을 느끼어 더 이상 음식을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방 나라들의 침략이나 수탈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답게 영광된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0절에 “내가 북편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여 메마르고 적막한 땅으로 쫓아내리니 그 전군은 동해로, 그 후군은 서해로 들어갈 것이라 상한 냄새가 일어나고 악취가 오르리니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북편 군대’는 유대 땅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메뚜기 떼’를 말합니다. 그 메뚜기 떼를 그 왔던 북쪽으로 다시 쫓아내어서 동해와 서해로 들어가 상하여 악취를 풍기며 멸절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 ‘북편 군대’는 장차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피해를 입힐 ‘바벨론 군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후에 또 다가 올 고난에 대해서 복합적으로 주어지는 예언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일을 행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북편 군대를 물리치는 일을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바로 ‘큰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와 민족과 어떤 왕이라고 하더라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메뚜기 떼를 부르시거나 다시 쫓으시는 일을 그 시와 때를 따라 하시는 능력을 가진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한 일을 선민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 백성이 올바르지 못한 길로 갈 때에 징계하시기 위하여 하십니다. 또한 저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칠 때에 긍휼히 여기사 돌이키시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온 우주를 운행 하시되 선민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하십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큰 일은 바로 택자이신 저와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도록 하시는 모든 일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에게 징계의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아픔 속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에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시키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큰 일을 통하여 우리가 참되고 바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진심으로 회개한 선민에게 이전과 같은 풍요로운 회복을 주십니다.
21절에 “땅이여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음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땅이여 두려워 말고’라는 말은 메뚜기 떼의 재앙과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불모지로 변한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선민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피폐한 땅을 회복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소출을 내는 비옥한 땅으로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로 인한 고통이나, 연단을 위하여 받는 고난으로 인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고난과 아픔으로 내 인생이 드디어 끝이 났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 통장의 잔고가 사라지고 안전한 직장에서 해고되며 주신 기업이 사라진다고 해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마시고 나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만을 생각하고 전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병훈련소는 훈련병의 성취만을 생각합니다. 또한 훈련병은 자신이 입고 있는 훈련복이나 각종 비품등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충분히 주어지고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훈련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훈련병이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기대했던 수준에 이르게 되면 이전의 물품을 다시 돌려주고 그에 맞는 각종 물품들을 더하여 줍니다. 세상의 이치도 이러한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재물이나 명예나 성공과 같은 것에 절대로 마음을 두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만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은 다 회복됩니다. 필요한 모든 것은 다 지급됩니다. 혹시라도 내가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나에게 있는 재물이나 명예나 성공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것은 다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 신경을 쓰다가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면 그동안 걱정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 얼마나 쓸데없고 무익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됩니다. 그 분만을 인하여 기뻐하게 됩니다. 세속의 가치는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 중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성숙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들짐승들아 두려워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 일이 이루어지면 ‘들짐승들’도 안식과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택한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황폐하고 척박한 땅에서 ‘싹이 나며’, 벗겨진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힘을 내는도다’라고 했습니다.
23절에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의 자녀들아’라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과 성공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지만 ‘시온의 자녀들’은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들입니다. 신자가 누리는 최고의 복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주하는 땅에 비가 내리고 싹이 나며 열매를 맺는 것도 복이지만 근본적인 복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아픔 속에서도 지금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위험한 지역을 다닐 때에 돈이 많은 것도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하여 더욱 위험해 질 뿐입니다. 하지만 그 위험한 지역에서 경찰과 함께 가는 것은 참으로 안심이 됩니다. 그로 인하여 안심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여로에는 재물이나 성공이나 명예가 있다고 해서 안심하고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신의 인생길에 여호와께서 함께 동행해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서 참된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 진실한 교제를 나누고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임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의 없어질 것으로 인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신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직장을 짤리고, 할 일이 없어서 자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세상의 주관자이신 분이십니다. 그 위대하고 전능하신 분이 우리와 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십니다.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라고 했습니다. 농경의 신 바알과 같은 허상이 주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풍성입니다.
24절에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풍요로움과 회복입니다. 앞선 10절의 저주를 완벽하게 반전시키는 회복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회개한 언약 백성에게 넘치는 풍요로움을 주시며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 회복시키십니다. 이러한 회복은 참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순전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과 벗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공급하셔서 우리 마당에 밀이 가득하게 하시며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3. 회개한 백성들과 진정한 관계 회복을 통하여 영원한 평화를 주십니다.
이러한 풍요로움과 회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불안한 회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둘러싼 영원한 평화가 주어지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주리니”라고 했습니다.
‘갚아주리니’라는 말은 ‘완전하게 배상하여 회복시키신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잃은 것만큼 다시 보상해 주실 것이며, 고통을 당한 기간만큼 그들의 삶을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인간 군대가 아닌 메뚜기 떼로 인한 것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것은 온 세상 만물의 주관자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이 발달한 지금도 천재지변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토네이도와 지진과 쓰나미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땅이 꺼지는 싱크홀이나 갑자기 변하는 자연 현상은 인간의 과학이나 지식으로 도무지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에게 그러한 모든 것들도 완벽하게 통제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온 우주에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이러한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가지는 백성들은 그로 인하여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6절에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배불리 먹어도 찬송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 앞길에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앞길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배불리 먹어도 또한 찬송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앞길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영구한 평화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배불리 먹고 또한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수치’는 구체적으로 당시에 전쟁에서 패배함으로 일어나는 온갖 종류의 재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민들에게 다시는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게 하겠다는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27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그런즉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고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너희가 알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알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격적으로 알며, 깊은 관계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 그 사람을 잘 이해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말과 행동이 거슬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심지어는 미워지기까지 했는데 그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하고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하여 알게 되며 서로의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면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용납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여호와의 언약 백성들은 이러한 재앙과 회개와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인격적으로 알게 됩니다. 왜 시험과 연단을 주시는지? 왜 온 세상을 동원하여 언약 백성과 나라들을 훈련시키시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 되는 참되고 본질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과 죄성을 알게 되고 그러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우리를 참되고 바른 모습으로 회복시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깊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영원한 평화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겸손한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제는 그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아닌 거룩한 길을 가야 합니다. 교만이 아닌 겸손히 회개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한 큰일을 통하여 풍요와 영원한 회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늘 동행하게 됨으로 그 분과 진실한 사귐을 가지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어떠한 고난과 아픔이 세상 여로에서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용사가 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써 그 허락하신 인생길에서 수없이 만나게 되는 ‘여호와의 날’에 멸망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의 큰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찬양함으로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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