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13일 주일예배 설교
사무엘상 4:1-11
에덴동산이 어디일까요? 바벨탑은 어디에 세워졌으며 또 노아의 방주는 어디에 있을까요? 과연 성경의 원본은 아직까지 존재할까요? 주일학교 시절에 성경이야기를 듣고 읽으며 가졌던 의문이었습니다. 또한 중ㆍ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러한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인정하고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여호와의 언약궤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궤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기록한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들어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 시절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인디아나 존스가 상영되었는데 그 내용이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궤에는 신비한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언약궤를 차지하는 나라가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언약궤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한 물건이나 장소에 관심을 가질까요?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헛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신성한 물건들은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과 함께 그러한 신성한 물건들이 가지는 엄청난 힘이나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물건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거나 섬깁니다. 그러면 그 물건은 바로 그 순간에 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될 만한 물건들을 사라지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기드온은 300명으로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그만 그들로부터 받은 금으로 에봇을 만들어서 자신이 사는 성읍에 두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기드온이 만든 에봇을 우상처럼 섬겼습니다. 한낱 사람이 만든 에봇에 대한 것도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의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가 담겨있는 언약궤에 대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그 십계명의 돌판에 하나님을 어떠한 형상으로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한 돌판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고 껍데기에 불과한 돌판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도 그러한 어리석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마치 여호와의 언약궤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해서 전쟁의 승리를 위해 앞세우다가 전쟁에서도 패하고 언약궤도 빼앗기는 처참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상징적인 물건에 불과한 언약궤를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방법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신앙의 내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외적으로 보이는 종교적 의식주의에 빠져버린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쟁의 패배와 함께 언약궤도 빼앗기게 하는 수모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에게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참된 신자인지 아니면 형식과 외식에 가득찬 종교인인지를 오늘 말씀에 비추어 판단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언약궤를 인하여 십계명을 지키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겸손하게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이 유명하고 거룩한 언약궤가 있으니 이 언약궤를 이용하여 온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달콤한 전리품을 취하려고 하는 종교인입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이름은 사람의 욕망에 의하여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블레셋은 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을 말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적대국가 이듯이 역사적으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항상 분쟁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기 위하여 에벤에셀에 진을 쳤습니다.
1b절에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라고 했습니다.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미스바 대 승리를 거두고 기념하여 세운 7장의 ‘에벤에셀’과는 같은 장소가 아닙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기는 치욕의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블레셋 군대가 거주하는 ‘아벡’은 과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시에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했던 성읍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곳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을 침략하는 전진기지로 삼았다는 것은 그만큼 블레셋의 세력이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기 위해서 ‘에벤에셀’에 진을 친 것입니다. 과거 여리고성을 무너트리며 승승장구했던 정복전쟁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그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위한 싸움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편리함과 부귀영화를 위해서인지를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하면서도 정작 그 명분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서라고 거짓된 변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 전쟁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서라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벤에셀’에 진치며 도우심을 바랍니다. 그러한 전쟁이니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러한 악한 계교를 가지고 있는 자들의 전쟁을 승리하게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 결과는 패배입니다.
2절에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고 했습니다.
‘그 둘이 싸우다가’라고 했는데 이 말은 좀 더 정확하게 생각하면 ‘그 전쟁이 허락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는 전쟁이 됩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십니다. 그러한 죄악과 고난을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허락한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이방사람 블레셋에게 졌습니다. 본문에서 실제적으로 죽임을 당한 병사가 ‘사천명’이라고 말하고 있을 정도로 명백한 패배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벌렸던 전쟁이었던만큼 그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대단히 충격적이었습니다.
3절에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라고 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이러한 결과에 대한 탄식이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원망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전쟁에서 지리라고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는 돌아보지도 않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겉으로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포장한 죄는 생각지 않고 하나님이 선택한 선민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내세웠는데도 졌다는 사실로 인하여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살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말과 행동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고 포장합니다.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고 싶어서 재물과 성공을 바라면서 겉으로는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으니 저에게 많은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업도 안되고 승진도 못하고 바라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자신의 죄는 돌아보지 않고 그저 ‘하나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고 한탄하며 원망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 본심인데 겉으로는 ‘저를 높이시면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하나님! 제가 유명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세상이 저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는 것인데 왜 저를 높여주지 않으십니까?’라고 원망합니다. 정확하게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들의 죄악된 속성에 속지 않으십니다. 그저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실패와 고난을 통하여 죄악을 깨닫게 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아니 더 적극적으로 죄악된 본성을 드러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언약궤는 그 안에 있는 내용으로 인하여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체험해야 합니다.
언약궤는 인간의 욕심이나 야망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뜻에 우리의 모든 삶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언약궤를 한낱 자신들의 쾌락과 평안과 즐거움을 위한 현세적인 가치를 얻기 위해서 여기 저기 이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이유입니다. 언약궤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임재하심에 대한 상징인 언약궤를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그 언약궤는 한낱 물질에 불과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고대 로마의 죄수를 처형하는 기구에 불과합니다. 성경책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종교서적에 불과합니다. 교회당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예배자의 자세가 없으면 일반 건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이 없이 십자가만 내세우면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군 전쟁이 그토록 끔찍한 실패를 가져온 이유입니다. 크고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물만 세우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교회가 된다고 착각하는 이유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책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당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본질은 생각지 않고 상징에 불과한 물질과 기호에만 집착하니 이단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육적인 소원인 전쟁의 승리만을 위해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이용하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장로들은 실로에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왔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궤와 함께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다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제 대제사장인 엘리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들이 ‘불량자’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으로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의 직분과 직위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불의한 일을 했습니다. 이는 그 아버지 엘리도 아는 일입니다. 이렇게 불의한 자가 거룩한 언약궤와 함께 있습니다. 스스로를 성결케 하지 않고 뻔뻔하게 언약궤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향후 전개될 상황에 대하여 예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궤가 불의하고 타락한 불량자와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인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고 편리하기 위해서라면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간의 죄악된 속성으로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통과하여 하나님의 본질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한 결과는 멸망입니다.
5절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고 했습니다.
한 번 패배한 이스라엘 군사들이었지만 언약궤가 그들에게 오는 것을 볼 때에 사기가 충천했습니다. 저들의 함성으로 땅이 울릴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 함성은 마치 여리고를 무너트릴 때를 연상케 할 정도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는 있지만 여호와의 임재는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배행위가 아무리 거룩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없다면 그 예배는 거짓된 것이며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많은 헌금과 거룩한 표정, 다른 사람에게 보여지는 외적인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한 그 모든 것은 거짓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물론 불신자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을 구별할 방법이 없습니다.
6~8절에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한 이유로 인하여 블레셋 사람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여호와의 크고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여호와를 당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위에 대해서 모릅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이스라엘의 신들보다 약하다는 사실로 인하여서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서 필시 패배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불신자들의 마음도 움직이셔서 선민들을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9절에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의지하여 다 이긴 것처럼 용기백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이미 신들의 영역에서는 지는 것이 확실하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 최선을 다해서 남자답게 싸워보자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움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도 다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함을 모독하고 언약궤를 이용하여 범죄하는 선민들에게 징계를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임을 우리는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10절에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며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이 패하였습니다. 그 희생자가 삼만입니다. 앞선 싸움에서는 4천명 가량의 희생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8배나 되는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에 해당하는 엄청난 희생입니다. 이는 명백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블레셋이 강대하였거나 현명하였기 때문에 이긴 것이 아닙니다. 블레셋은 단지 그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또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라는 표현은 각 군인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앞선 싸움에서는 비록 졌지만 도망가지 않고 진영을 지키며 다음 싸움을 대비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럴 겨를도 없는 완전한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사실입니다.
11절에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며 이스라엘의 정신적 구심점인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멀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후에 나오지만 이러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엘리 제사장과 그 며느리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습니다. 이를 총체적으로 나타내주는 사건이 바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긴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일까지 감수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저들의 이러한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이 없거나 능력이 부족하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민의 징계와 깨달음을 위해서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일을 통하여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신자의 범죄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로서는 더 이상 빠질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까지 이르는 멸망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자들이 잘못을 범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됩니다. 신자의 넘어짐을 통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우습게 여깁니다. 교회의 잘못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방하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용하는 패역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결과는 멸망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가벼이 여기고 우습게 여기며 한낱 썩어질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쾌락과 바꾸는 신자의 모습에는 당연히 징계의 채찍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위로 교통 내주하심의 역사가 외적인 조건이나 상징을 우상처럼 섬기지 않고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질만을 믿고 따르는 참된 신자가 되어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루 하루 진실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경향의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경말씀을 기록한 책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주기 위한 책일 뿐입니다. 교회당 건물은 믿는 성도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진실한 만남인 예배를 위하여 필요한 공간일 뿐입니다. 마치 언약궤나 책과 교회당 건물에 신비한 능력이나 표적이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진실하게 섬기는데 방해가 되거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버리십니다. 자신의 영광도 훼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언약궤가 사라진 것입니다. 성경원본이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돌 위에 남지 않고 멸망당한 것입니다. 마치 성경원본에 큰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우상처럼 섬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지 않고 예루살렘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외적인 것이나 사라질 것에 신경을 쓰지 말고 세상 모든 만물을 통하여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경외하고 따르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겸손한 마음으로 날마다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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