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1일 주일예배 설교
잠언 16:1-9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 또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한 평생 애를 씁니다. 집 한 채, 차 한 대, 좋은 자리를 얻거나 가지기 위해서 날마다 생각하여 계획하고, 분주하게 노력합니다. 어릴 적 꿈과 청년 때의 이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오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토록 원하고 바라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으며,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희생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걸음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인정하시는 길이였는지를 상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이렇게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고민할 때에 우리는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바쁜 현실에 둘러싸여 하루하루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분명한 축복이 주어지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신 말씀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자가 되어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일의 행사를 전적으로 여호와께 맡기는 것입니다.
1절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은 ‘붉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로 ‘아담’이라고 읽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 사람을 만들고 ‘아담’이라고 명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 ‘아담’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즉 한계성을 가진 피조물임을 인식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물 ‘아담’이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마음의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피조물 ‘아담’이 그 마음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계획하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의 범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획의 결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기업의 사원이 제 아무리 많은 일을 생각하고 추진하는 열정이 있다고 해도 결국 그 결재는 사장이 허락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원은 사원의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피조물인 ‘아담’은 그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자신의 모든 길을 여호와께 아뢰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지만 그 자유의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생각하고 모든 일의 결정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올바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보기에는’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주관적 견해로’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사람의 행위 기준이 여호와가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내 판단과 견해로 생각해 볼 때에 옳다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땅에서 살 때에 흩어짐을 면해야 된다고 하는 판단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대적하는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위험한 상황이니까 더 이상 제사장 사무엘을 기다리지 말고 왕인 내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판단한 사울의 행위는 자기 보기에는 정당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고 눈 앞에 펼쳐진 상황으로 마음이 조급해져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의 경영과 행위가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생각과 판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넘어서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위가 옳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도 정당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여호와 앞에서 엄청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따라서 신자는 늘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한 순간의 생각과 감정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면 그 결과는 여호와 보시기에 크나큰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감찰하다’는 말은 ‘저울질하다’, ‘달아보다’라는 뜻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나, 그 나타난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심령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을 저울질하고 달아보심으로 정확하게 판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삶은 여호와의 판단으로 결정 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결과나 행위가 아니라 신자의 심령 깊숙한 곳을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기억하며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그 모든 행사를 다 여호와께 맡기는 자들입니다.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너의 행사’는 ‘사람이 시도하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맡기라’는 말은 ‘굴리다’, ‘옮기다’는 뜻입니다. 즉 내 손에서 뭘 해보려고 하지 말고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로 옮기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생각하는 일들, 계획하고 실행하려는 모든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해서 이러 저러한 결과를 내겠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을 다 여호와께로 옮기셔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옮기는 것을 미루는 것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즉 모든 일들을 여호와께로 옮겨버리고 인제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일들에 대해서 방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으로 일하려 하지 말고 이 모든 일들의 시작과 진행과 마침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섭리 안에 있음을 굳게 믿고, 매 순간마다 나의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사는 신자는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늘 기도하게 됩니다. 또한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찾게 되니 자연스럽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여 모든 일들을 여호와께로 다 옮길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그 방향을 잡게 되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에 그 각각의 목적에 맞도록 맞추어서 만드셨습니다. 필요 없는 것을 만드시지 않았고, 온 세상의 보존과 유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창조하셨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합니다. 이러한 창조는 악인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을 오해하여 하나님께서 악의 조성자가 되셨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불순종과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모든 행위도 결국 하나님의 창조 주권 아래에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러한 악인의 모든 계획과 결과도 선하신 하나님의 창조 주권의 섭리를 변경시키지 못한다는 표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의 모든 계획과 행동은 다 교만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5절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교만한 자’는 4절의 ‘악인’을 다르게 표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악인의 전형적인 특징이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창조주이며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으니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뢰하거나 맡기지 않습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교만한 모든 자들’을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은 ‘가증히 여기다’는 뜻으로 우상 숭배나 우상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서 결탁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하반절에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기록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여 모든 행사를 그에게 맡기는 의인은 그 경영하는 것을 이루지만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고 교만한 악인들은 그 모든 행사를 맡기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의 심판의 때에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절대자 하나님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행사를 맡기는 경외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허락하신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2.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첫 번째 복은 모든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에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하여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자와 진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순종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는 이방인들이 말하는 진리와는 다릅니다. 또한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신앙에 기초한 생활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에 신자는 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각종 허물과 실수에서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쫓아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즉 단순히 악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뿐 아니라 철저하게 악을 쫓아버려 멀리한다는 말입니다. 완벽한 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악을 외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악을 진멸하여 버린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악이 주변에 있습니까! 단순히 악을 피한다고 해도 또 다른 악과 유혹이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사방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사명자로 보냄을 받은 성도는 단순히 악을 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쳐서 진멸하여 소멸시키는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방법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다 여호와께 의뢰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며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오늘도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며 섭리임을 고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바로 겸손한 인생입니다. 나와 내 가족이 이 험한 세상 속에서 거할 집이 있고, 일용할 양식이 있으며, 하늘의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은혜이며 보호하심이라는 인식이 있는 성도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두 번째 복은 원수와 더불어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화목하게 살게 되는 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면 반드시 다른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세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성도는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아름답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세 번째 복은 의의 소득을 얻는 것입니다.
8절에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의를 겸한 소득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하며 얻는 소득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불의를 겸한 소득은 인간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하여 제정된 최소한의 법까지 무시하면서 벌어들인 소득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의를 겸한 적은 소득이 불의로 얻은 많은 재물 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당연히 의를 겸한 소득을 가지게 됩니다. 실정법을 무시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가진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영리 활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법과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소득이 줄어드는 것도 개의치 않는 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재물을 얻기 위해서는 보이는 인간의 법조차 무시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도 무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불의한 자의 방법으로 얻은 많은 소득이 그를 평안과 즐거움으로 인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교만한 자로서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의의 소득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며 감사하는 삶을 선택합니다.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자의 걸음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면 악에서 떠나게 됩니다. 우리의 원수도 결국은 화목하게 됩니다. 의의 소득을 얻게 됩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악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고, 우리를 해하려는 원수도 굴복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소득을 얻게 되어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성도 여러분!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구절입니다. 다 아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믿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모습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여기까지 우리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어쩔수 없이 여기까지 오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으로 가려 했던 그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길이었기 때문에 막으셨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자기의 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내 뜻과 결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뜻과 결정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라고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의 길을 겸손하게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길을 걸어갔는지 점검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내 의가 충만하여 나의 행위가 깨끗하고 정당하다고 착각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떠난 자가 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합리화하지 말고 모든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악에서 떠나게 하시고, 원수와 화목하게 하시며, 의의 소득으로 감사하는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러한 복된 삶을 살아가심으로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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