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5일 어린이주일 설교
삼상 2:12-26 (1 Samuel 2:12-26)
아이들에게 환경은 참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부모들은 자녀를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것이 정말로 그 자녀에게 좋으냐는 사실입니다. 조기 교육이 좋을 수도 있지만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맡겨두는 자율방식이 좋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약간의 통제적인 방식이 좋을 수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이 좋을 수도 있지만 또 어떤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방종이나 게으름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것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찢어지게 가난함으로 인해서 엇나가거나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한 주입식 교육방식이 좋을 수도 있고, 생각하는 교육방식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교육방법이 효과를 보았다고 해서 그 방식이 내 자녀에게도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저마다의 품성과 인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사람에게 효과가 있는 획일적인 교육방법은 사실상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교육은 어려운 일이며, 정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위한 가르침을 소흘히 하거나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서 고민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 해답은 분명합니다. 본문 21절 하반절에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서’자랐다는 말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그 어머니 한나가 눈물의 기도로 얻은 귀한 아들입니다.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 자신의 아이는 다 특별하지만 한나에게도 사무엘은 특별한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 귀한 아이를 위하여 그 부모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의 방식만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내 아이를 위하여 위장 전입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가족의 삶의 패턴을 아이들 위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한다고 해서 내 아이도 그렇게 해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쓸데없는 경쟁을 하면서 온갖 희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모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였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결과 아이 사무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하였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우리는 맡겨주신 자녀를 오직 ‘여호와 앞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이 방법은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효과를 가져 옵니다. 부작용이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어도 이 방법은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언약의 자녀를 오직 ‘여호와 앞에서’ 자라게 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종류의 아들들이 대비가 되어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라는 사무엘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입니다. 물론 엘리의 아들들이나 사무엘은 다 여호와의 전에서 자랍니다. 같은 학군, 같은 학교, 같은 조건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랐다고 하지만 엘리의 아들들에게는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요? 그에 대한 해답을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에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량자’라는 말은 ‘가치 없다, 비열하다, 타락하다, 악당들’이라는 뜻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도대체 어떠했길래 이러한 평가를 받은 것일까요? 그들은 바로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분명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고 여호와의 전에서 자랐는데 어떻게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였’을까요? 여기서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면서 본인도 역시 제사장인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그 분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불량자’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는 불량자의 행동은 이러하였습니다.
13~14절에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두 번 행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했습니다. 한 두 번은 실수이지만 계속되는 것은 ‘습관’입니다. 그 ‘습관’은 제물에 대한 갈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제사에만 쓰이는 거룩한 성물인 ‘세살 갈고리’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구약 시대의 제사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합니다. 그만큼 각 제사에 있어서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몫이 다릅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필요한 때에, 원하는 만큼 고기를 취했습니다.
15~16절에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라는 말은 ‘제사를 드리기도 전에’라는 말입니다. 앞선 14~15절의 행위는 그래도 제사가 어느 정도 마쳐진 상태에서 행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오는 악행은 제사가 드려지기 전 즉 하나님께 제물이 드려지기도 전에 바쳐질 제물을 가로챈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제정한 제사 제도 자체를 허물어트리는 엄청난 죄악입니다.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사장의 사환에게 하는 말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도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를 알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제사를 드린 후에, 즉 14~15절의 상황에서처럼 하나님께 재물이 드려진 후에는 그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에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 죄에 대하여서는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책임을 물을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을 받으시기 전입니다. 그래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빼앗을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 제사장에 그 사환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조금도 없습니다. 제사장이라는 직책에 대한 이해나 성실함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로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존재합니다. 이는 바로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하여 저자는 한 마디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17절에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거룩한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제사장에 의하여 거룩한 제사가 멸시됨으로써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파괴된 것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제사장의 권한을 오용하고 남용하여 하나님의 제사를 모독하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불량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는 정말로 심각한 것입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크다’라고 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제사가 유일합니다. 그런데 이 제사를 방해하고 멸시하였으니 그 죄는 가장 큰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의 아들들은 시간과 공간적으로는 ‘여호와의 전’에서 자랐으나 실제적으로는 전혀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여호와를 신뢰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찌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으며, 그 분의 법도를 믿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올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2.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렇게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으며, 그 말씀에 불순종하는 엘리의 아들들과 대비되는 사람으로 저자는 사무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8절에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살고 있지만 (그러나)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여호와 앞에서’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마포 에봇’은 일반 제사장들이 입는 겉옷을 말합니다. 즉 사무엘은 다른 아이들처럼 집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생활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절에 “그 어미가 매년제를 드리러 그 남편과 함께 올라갈 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한나는 매년제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올 때마다 아들 사무엘을 위하여 ‘작은 겉옷’을 지어서 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작은 겉옷’은 일반적인 옷이 아니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수한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한나가 자신의 아들 사무엘을 위하여 ‘작은 겉옷’을 지은 이유는 물론 아들 사무엘을 향한 사랑과 관심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그를 위한 특수한 ‘옷’을 지어서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마음은 참으로 애틋합니다. 한나에게 있어서 아들 사무엘은 정말로 귀한 아들입니다. 특별히 통곡하며 기도해서 나은 아들이기도 하며, 여호와께서 그녀를 생각하신 결과로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귀하고 특별한 아들이 자신과 떨어져 성전에서 머물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불과 몇 번 밖에 만날 수 없으니 참으로 애틋한 관계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엘리 제사장은 엘가나와 한나 부부에게 축복기도를 합니다.
20절에 “엘리가 엘가나와 그 아내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게 후사를 주사 이가 여호와께 간구하여 얻어드린 아들을 대신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니 그들이 그 집으로 돌아가매”라고 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후사인 사무엘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렸기 때문에 이들 부부에게는 기업을 이을 후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엘리의 기도는 사무엘을 대신하여 이들 부부의 대를 이을 후사를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부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허락하셨습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했습니다.
‘권고하사’는 말은 ‘계획되어진 방문’을 말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분명한 계획으로 한나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결과 ‘세 아들과 두 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사무엘 외에 엘가나와 한나 가문의 대를 이을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고하심’이 가져온 축복입니다.
엘가나와 한나 부부는 사무엘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신실하였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며, 대를 이을 아들이었지만 약속대로 하나님께 완전히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 드려진 아들 사무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와 함께 자랐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와 함께함으로 인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풍성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와 동행한 사무엘은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실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자신의 민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겠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올바른 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정답입니다.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는 근본적인 해답입니다.
3. ‘여호와 앞에서 자란’ 결과는 은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 법도와 제사를 멸시한 엘리의 아들들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뜻대로 살았던 사무엘은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았습니다.
22~23절에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매우 늙었더니’라고 하는 말은 나이 많아 늙음이 아니라 영적으로 매우 무능력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제야 아들들에 대한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악행이 시작될 때부터가 아니라 극에 달하여 ‘온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에게서’ 듣게 될 때에야 비로소 아들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작정하고 속이면 모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곳에서 본인도 제사장이며 아들들도 제사장인데 어찌 그렇게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몰랐다고 한다면 그만큼 영적으로 어두운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들의 걸음걸이나 행동이 평소와 다른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본능적으로 압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을 모른다고 한다면 그 부모의 영적인 상태가 그야말로 최악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예배를 잘 드리는지, 받은 용돈과 소득의 십일조를 잘 드리는지, 교회에서 각종 봉사와 헌신을 잘하고 있는지를 담당 목사나 교사의 말을 통해서 들을 때에는 이미 늦습니다. 그들에게 들어가기 전에 이미 부모는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영적인 권위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영적으로 매우 무능력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담당 교사와 교인들이 얘기해 줄 때까지 그 아이를 방치한 것입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들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심지어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당시 이방신전에서 행하는 관습들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가나안의 죄악된 관습들과 각종 이방 제의들을 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성결함을 유지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제사장들이 오히려 이러한 악을 앞장서서 행하고 있으니 악하고 악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을 자행함으로 그 아비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자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향한 엘리의 권고는 강하고 정당하였으나 때가 늦었습니다. 그 악행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24~25절에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내 아들아 그리 말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향한 아비의 권면입니다. 그러나 악한 아들들은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이 많은 아버지는 머리가 큰 아들들에게 경고와 권면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말에 순종하지 않은 죄도 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음에 대한 질책이었기 때문에 그 죄는 더욱 큽니다. 따라서 단순히 경고하고 권면하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훈계와 권면으로 듣지 않으면 징책하라고 했습니다. 벌을 주고 징계하라는 말입니다. 제사장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근신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나오는 29절을 참조해 보면 이는 엘리 제사장이 그 자식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모로서의 권위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녀들이 저지른 범죄와 그 범죄가 가져올 결과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가 아니라 여호와께 범죄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결과 경고와 권면 이상의 행동을 취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앞에서 자란’ 사무엘은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습니다.
26절에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도 멸시하고 육신의 아비의 권면도 무시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결국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무엘은 죽음이 아닌 은총을 입었습니다. 이 분명한 기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들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교육하라는 말입니다. 세속적인 가치를 심어주지 말고 하나님의 가치 영적인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고 기도하며 양육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주 쉽고 명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여호와 앞에서 자라면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는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여 그 분의 말씀을 멸시하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며 결국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아무리 귀한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약속대로 하나님께 바치며 그 분의 법도대로 양육하면 ‘은총’의 자녀가 되지만,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기면 그 자녀도 망하고 본인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에 귀한 언약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대로 양육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는 자녀로 만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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