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8일 주일예배 설교
예레미야 6:16-21
우리는 오늘 수없이 많은 선택의 결과에 의해서 한 장소에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 어떤 학교로 진학 할 것인가의 선택, 어떤 분야를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 졸업 후에는 취직과 더 많은 공부 사이에서의 선택, 누구와 인생의 동반자가 될 것인가의 선택과 같은 결과에 의해서 지금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있어서 먼저 멈춰야 합니다. 남들이 진학 하니까 나도 가고, 남들이 이사 가니까 우리도 가고, 남들이 투기 하니까 우리도 하고, 남들이 몰려가니까 나도 일단 가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내가 선택한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적어도 한 번은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선택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면서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레미야 선지자는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면서 바쁘게 걸어갑니다. 일찍 일어나서 학교와 직장에 갑니다. 남들 보다 조금 더 먼저 가고,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살아갑니다. 도무지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욕망의 길인지를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남보다 빨리 이 길을 가려고만 합니다.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그 길은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사고가 없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길을 조금만 멈추고 생각하면 좋은 방향성을 가지게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자가 그 길을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된다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음성을 통하여 선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순간만이라도 내일을 위한 계획이나 앞길을 향한 분주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길을 찾아서 그리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형통합니다. 재물을 손해보고, 명예가 없고, 그 누가 알아주지 않는 길이라고 해서 나쁜 길이 아닙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성공인지는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신자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옛적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선한 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갔던 선진들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오늘 저와 여러분도 우리를 향하여 예비하신 선한 길을 찾고 그 길을 걸어가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선한 길로 행하는 성도는 심령에 평강을 얻습니다.
법을 지킨 자와 지키지 않는 자의 차이는 그 마음의 평강입니다. 제 아무리 많은 이익을 얻어도 그것이 불법으로 인한 것이라면 몸은 일시적으로 편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세상의 법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는 신자의 마음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행했던 우리의 잘못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떠했습니까? 눈 앞의 작은 이익이나,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를 어겼지만 그것이 영원한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잠시의 만족과 동시에 깊은 불편함이 우리의 심령을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를 지키기 위해서 손해를 보고 불편을 감수했을 때에는 오히려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금전적인 손해와 여러 가지 불이익으로 인해서 많은 고통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쁨이 우리의 마음을 풍족하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참으로 심령에 평강이 있었습니다.
16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길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은 단수가 아닌 복수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로에서 만나는 수많은 ‘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택의 순간에 먼저 ‘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어떤 선택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멈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라는 말입니까?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를 찾아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을 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이익을 주는 길’이 아닙니다. ‘명예와 보람이 있는 길’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길들’ 중에 오로지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살면서 물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을 찾았던 그 길을 말합니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의 기준으로 걸어갔던 그 길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길을 찾았으면 망설이지 말고 ‘그리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과 반대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길로 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조롱하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창피해하지 말고 가라는 말입니다. 그 길로 행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가면 우리의 심령이 평강을 얻는 것입니다.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심령’은 사람의 전 인격을 뜻 합니다. 또한 ‘평강’은 ‘휴식’, ‘쉼’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의 쉼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한 길’이 어디인지를 찾고 그 길로 행하였을 때에는 우리의 전 인격이 참된 행복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명령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그 명령을 따라 ‘선한 길’로 행하여 참된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 백성은 그 길을 거절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속성입니다. 세상과 타협하여 선한 길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의 헛된 욕망에 어두워서 선한 길이 어디인지를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판단이 하나님의 판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여 세상 길이 선한 길보다 더 좋다고 판단하여 그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한 길이 아닌 세상 길로 간 유대 백성들은 망했습니다. 완전히 망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한계를 가진 인간이 원한 길로 갔으니 당연히 멸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선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신의 기질을 이기지 못하여 ‘선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갑니다. 알면서도 갑니다. 성질부리면서 멸망길로 갑니다. 자존심과 욕심 때문에 ‘선한 길’을 가지 못하고 ‘악한 길’로 갑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길로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고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선한 길’을 가지 못하고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악한 길’로 갑니다. 그 길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자신의 의를 잠시 만족시켜주는 사람들의 환호와 으쓱함은 있을지 몰라도 심령에 평강이 없습니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온갖 말로 소문과 악을 퍼트리는 사람들은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주목은 받을지 몰라도 심령에 평강이 없습니다. ‘선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갔던 ‘선한 길’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과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또 다시 경고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파숫군을 통하여 나팔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7절에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선한 길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한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파숫군’을 세우셨습니다. ‘파숫군’은 외적의 침입이나 위험을 경고하는 사람으로 ‘선지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선한 길을 찾고 그리로 행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위하여 최후의 수단으로 선지자를 통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신 것입니다. 선한 길이 아닌 악한 길을 가면서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의 잘못으로 그릇된 길을 가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집을 나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탕자를 찾기 위하여 골목마다 업소마다 전단을 만들어 붙이고 찾는 어버이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음성을 들으면 멸망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여전히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완악한 백성들입니다.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음성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설교자를 통한 명백한 경고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실수하고 악을 행하는 죄인들이지만 그러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한 경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우리는 이 음성을 통하여 멸망길을 피하고 선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길을 거부하고 악한 길로 가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 음성을 듣고 겸손히 순종하면 심령에 평안을 얻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돌이키면 다가오는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2.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 무리는 그 생각의 결과로 인해 재앙을 받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 번에 걸쳐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끝까지 거절하였습니다. 듣기를 싫어하였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선한 길을 찾지 않았습니다. 악한 길에서도 파숫군의 나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18절에 “그러므로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고 했습니다.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유다 민족이 당한 심판의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기록이 되어 알려졌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역사 기록으로도 알려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신자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명백한 심판의 결과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살았으며 계속되는 경고의 말씀도 거역한 신자가 가야 하는 길임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다 백성에게 임한 재앙은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동한 결과가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여 결정한 일들의 마지막이 엄청난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재앙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의 생각은 바로 이렇게 악한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고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로 가는 결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면 더 이상의 인간적인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들려지면 합리적이고 편리하며 이기적인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고 생각하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것 저건 상황을 파악하며 생각하면 풍성한 감사를 하나님께 고백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형편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합당한 봉사를 충성되게 할 수 없습니다. 10에서 하나를 드리면 9만 남기 때문입니다. 10 모두를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들 공부하는 시간 생각하고, 남들 일하는 시간 생각하고, 남들 소비하는 수준 생각하면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봉사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의 결과’가 재앙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은 생각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이 재앙을 주셨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죄악된 인간이 행한 ‘생각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도를 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두려워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생각과 내 판단을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합리화 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우리 앞에 놓여진 ‘길들’을 가기 전에 멈춰서 ‘선한 길’이 어디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찾았으면 ‘세상적이고 합리적인 생각’하지 말고 그 길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다가 파숫군을 통한 나팔소리가 들리면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가는 길이 ‘악한 길’이 아닌 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재앙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20절에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고 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 참된 신자는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또 나는 과연 참된 신자가 맞는지 뼈를 깎는 심정으로 돌아봐야 합니다.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는 예수로 인하여 선한 길을 가는 사람인지, 아니면 악한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하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서도 신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헌금을 드렸다고 해서 견고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빠짐없이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모두가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이 온갖 귀한 것이 있다는 ‘시바’에서 질 좋고 귀한 ‘유향’을 가지고 오며, 저 멀리 인도와 같은 ‘원방’에서 수입한 ‘향품’으로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열심과 열정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러한 ‘번제’를 받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에 진실된 내용이 없으며, 외부적인 화려함만 있는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진실한 ‘파숫군’의 ‘나팔소리’를 거절하면서 아무리 화려한 의식과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태도를 가진 자들을 향하여 노를 발합니다.
자기는 탕자처럼 살면서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그러다가 나중에 그것이 미안해서 인테리어를 다시 해주고, 많은 돈을 주며 결혼 생활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역겹지 않습니까? 사람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창조주 하나님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무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 주일 날 많은 돈을 가지고 와서 헌금하면서 ‘한 번 봐주시고 다음에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한다면 이 어찌 올바른 신자의 태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자들의 말로는 반드시 멸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1절에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아들이 돕습니다. 반대로 아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아버지가 힘껏 도와서 헤쳐 나가게 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일이 닥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도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는 말입니다.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고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도울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친구가 보증도 설 수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부자가 함께 멸망하고, 나라와 민족이 망함으로 인하여 이웃과 친구도 서로를 도울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선민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모욕하며 이용하려 하였으니 받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실제로 북방에서 온 나라에 의하여 유다는 멸망하였습니다.
오늘 날 신자인 우리도 각성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의 편리함과 유익을 위해서 잠시 잠간 이용하거나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다가 내 생활의 편리함이나 내 가족의 일에 조금이라도 걸림돌이 된다고 하면 그 신앙생활과 교회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성공과 세상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이름이나 교회를 향한 열정도 간단히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먼저 보고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의 행위를 먼저 보고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숙한 신앙인은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세상의 유명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전도의 도움이 될 거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천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이 전도의 막힘이 될 거 같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러한 세상의 변화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 택자 구원 운동은 인간의 그 어떠한 결단과 선택으로 인하여서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택자 구원의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한 대로, 태초부터 계획하신 시간 안에 진행되는 오직 그 분만의 영역입니다. 감히 사람의 생각과 결단으로 도움을 준다거나 방해를 할 수도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옛적 길 곧 선한 길’을 찾아야 합니다. 수없이 많은 ‘길들’ 가운데에서 어떤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길’인 지를 찾고 그 길로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 형통합니다. 심령에 평강을 얻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가운데에서도 당당한 신자의 모습을 가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고 있는 이 길에서 오늘 날 세워주신 ‘파숫군’인 설교자를 통해서 선포되는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 합니다. 그 음성을 듣고 자신의 잘못된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면 삽니다. 다가오는 재앙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갔던 그 길! 세상의 모든 대적들과 구별된 거룩한 그 길! 외롭고 힘들고 지칠 수도 있지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참된 그 길! 그 선한 길로 걸어가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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