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2일 어버이주일 설교
요한복음 19:25-27 (John 19:25-27)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손자! 손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가족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들이 주는 관계는 명확합니다. 나를 낳아주신 남자는 아버지! 여자는 어머니가 됩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낳은 여자는 딸! 남자는 아들입니다. 이것은 사전적인 의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말로는 설명될 수 없는 끈끈한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들이 그러한 의미로 불리워질 때에 우리의 가슴이 뭉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서 맺거나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를 부정하거나, 악용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주 단호하게 이러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고 했습니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6),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 6:20~21),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 23:25),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이러한 선언은 단순히 종교적, 도덕적 교훈 차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은 진리 차원의 선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천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모에 대한 효도나 주 안에서 올바른 자녀 교육에 관해서는 성경 말씀의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아디아포라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서 그 영혼을 떠나보내시기 전에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말씀을 하시는 부분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는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면서 육신의 어머니를 ‘고르반’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려진 재물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는 절대로 사용될 수 없음을 말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행한 ‘서원’대로 모든 것을 준행하여야 한다는 ‘고르반’이라는 본질적인 뜻은 간 곳이 없고 그저 부모님을 봉양하기 싫어서 자신의 모든 재물을 ‘고르반’ 했다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형식적으로 일부만 드리고 나머지는 아주 합법적으로 자신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개인적인 죄나 문제로 인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인류 최대의 사건을 완성시키는 최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어머니를 향하여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고르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를 모른척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르반’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어버이 주일을 통하여 역사적이고 위대한 사역의 정점에서도 ‘고르반’ 하지 않고 ‘보라 네 어머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주신 부모 자녀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참된 효도는 가장 먼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바깥일을 하는 사람은 집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떻게 크는 지도 모르고,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밖에서 자신의 일만 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는 가장 크고 위대한 일을 감당하는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를 걱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 그 십자가 현장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많이 입은 두 명의 마리아가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 아픈 순간입니다. 아직은 자신의 아들이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상태와 심정을 예수님은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운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효도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과 많은 용돈을 드리는 것이 효도가 아닙니다. 부모님이 어떠한 생각을 하시는지! 무엇을 하시고 싶으신지 아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효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그 자녀들이 신앙생활은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온갖 것으로 부모님께 물질 공세만 한다면 그것은 참된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또 지금 당장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부모님에게 성경말씀과 찬송만 부르자고 한다면 그 또한 참된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부모님을 공경하며 바르게 효도하는 것은 가장 먼저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머니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 그리스도이고 약속된 메시야로서 온 인류의 대속을 위한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모르고 있는 어머니에게 지금 이 순간 그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정하신 때가 되어 이 죽음을 영광스럽고 필연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올 때까지 잘 사실 수 있도록 돌봐달라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 어머니에게 ‘이 영광스럽고 장엄한 십자가 사역 앞에서 왜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울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창피합니다.’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불효한 언동이겠습니까? 참된 효도는 이처럼 부모님의 마음을 올바르게 깨닫고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36년간 일본에 의하여 강제 점령당하는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또 어떤 사람은 일본에 빌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참 가슴 아픈 것은 독립을 위하여 한 몸을 희생하신 수많은 사람들의 후손은 참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큰 일, 보다 큰 가치를 위하여 싸우면서 자신의 가정은 전혀 돌보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친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끔찍하게 챙겼습니다. 일본으로 유학도 보내고 좋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만주와 중국에서 유리하고 방황하거나 조국의 땅에서 비참하게 살아가지만 그에 비하여 친일 반역자의 후손들은 너무나도 잘 살아가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그들에 대한 지원이 가능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고통 받고 외면 받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을 볼 때에 참으로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들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 해방된 조국은 저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독립 운동을 하던 분들은 자신의 신념과 뜻에 따라 자신의 한 몸 조국을 위해 바친 것이지만 가장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랏일을 하는 사람에게 집안일을 얘기하거나 신경 쓰게 해서는 안 된다!’는 풍토로 인하여 또 ‘큰 일을 하는 사람은 사소한 집안일을 돌아보는 것이 좀스러워 보인다!’는 생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을 외면한 결과로 그 남은 가족들이 참으로 고통과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일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키고 최소한의 호구 대책이라도 마련하였다고 한다면 남은 가족들이 그토록 비참한 지경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며 변절의 길을 걸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라와 민족보다 더 크고 위대한 목적을 향해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육신의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효도를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머니 마리아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을 그리스도이며 메시야로 고백하게 하는 결실을 맺으셨습니다. 참된 효도는 이처럼 올바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효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부모님께 안부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을 모셔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가장 먼저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님께 참된 효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2. ‘보라 네 어머니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혈연을 뛰어 넘는 영적인 가족을 말합니다.
예수님에게는 친동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어머니를 부탁하는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26절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제자 요한을 가리키며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제자 요한에게는 어머니를 가리켜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어머니를 돌보는 부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어머니의 부양을 생각한다면 자신의 친동생들에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옳습니다. 예수님께는 남동생들이 네 명이나 있고 누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으로 하여금 어머니를 모시게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저들이 아직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고 그저 육신의 형과 오빠로만 여겼기 때문에 저들을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8년 전에 이곳 미국으로 오면서 제 어머니는 동생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동생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면서 안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동생이 저와 같은 신앙 안에서 견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동생이 교회를 안 다니거나, 혹은 이단이라고 한다면 제 어머니를 안심하고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만약 제 어머니가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믿음이 없는 동생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불편이며 아픔입니다. 또 제 어머니가 믿음이 없는 분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제 마음은 불안할 것입니다. 비록 육신은 편하게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상태라고 한다면 저는 교회 가까운 곳에 조그마한 방을 얻어서 어머니를 모시고 신앙이 있는 친구나 후배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것입니다. 그 편이 어머니나 저에게 훨씬 좋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지상 최고의 슬픔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더욱 가슴 아픈 것은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내 아들이 죽었어야 하는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야말로 남은 생은 살아있지만 사는게 아닌 고통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이 제정하신 새로운 가족 관계로 인하여 어머니 마리아는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바로 믿음이 있는 제자 요한과 함께 거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제자 요한을 통하여 그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생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지나온 행적을 통하여서 그가 약속하신 메시야의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에 아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놀라운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의 혈육이 아닌 영적인 혈육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다 한 가족입니다. 아니 한 가족 보다 더욱 친밀하고 밀접하게 연관된 가족입니다. 육신의 가족은 피를 나눈 사이지만 영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신비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참된 믿음이 생긴 영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고백한 모든 이 땅의 성도들도 나라와 민족과 인종과 언어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하여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아직도 여러 가지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참된 가족의 사랑을 베풀지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를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죄에서 구원하여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였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놀라운 사실이 믿어지면 우리는 모두가 한 가족임을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자 요한은 바로 그러한 인식이 있었기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고 그 때부터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27절에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는 아픔을 간직한 마리아를 향하여 진실한 사랑을 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공경하여 모신 것입니다. 육신의 가족을 초월하여 새로운 가족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이 땅의 교회는 영적인 가족들이 모인 곳입니다. 비록 성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며 살아온 환경이 다르지만 예수 안에 한 가족입니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 순간 나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심으로 인하여 이러한 새로운 가족을 몸소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혈연이나 신분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한 가족입니다. 오늘 이 곳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서로의 기도제목을 놓고 진심으로 기도하는 필라 경향교회 성도들이 바로 영의 가족인 것입니다. 장년회원분들을 내 육신의 부모님처럼 살피고 사랑하며 기도할 때에 이곳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며, 유아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내 아이처럼 살피고 사랑하며 섬길 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며 하늘 아버지의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육신의 부모님께 진심으로 효를 다하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선언을 통하여 새로운 가족이 된 영적인 부모님께도 그와 동일하게 효를 다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땅히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섬기는 신자들의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됩니다. 육신의 부모님과 영적인 부모님을 향하여 진실한 효를 다함으로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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