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5일 주일예배 설교
창세기 15:1-7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의 생애는 하나님의 약속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 생애 동안에 5번이나 동일한 약속에 대하여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15장의 약속은 3번 째 확증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확증에 대한 배경은 14장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하여 북방 4개국 연합군과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훈련한 318명의 병사가 기습 작전을 통해 승리하기는 했지만 상대는 4개국 연합 정규군입니다. 나중에 아브라함에 대해서 알고 복수하기 위하여 쳐들어온다면 사실 아브라함의 가문은 멸절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두려움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불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미 두 번이나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땅의 티끌 같이 많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자녀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명이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약을 믿고 사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문이 멸절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는 불신앙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상황은 이해되지만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연약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결과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은 연약한 인간에서 여호와를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세상과 주변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선택하시고 구원하시는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의 변화와 정세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보다 더 신뢰하는 사람의 배신이나, 힘들게 쌓아놓은 명예와 재물의 사라짐으로 인해서 실망과 낙심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불변하다는 믿음은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일을 당하면 낙심하고 넘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과연 계시는지를 의심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의심 많은 우리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다시금 언약을 확신하고 믿음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오늘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임하여서 의심과 낙심이 사라지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1절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가문의 멸절이 두렵고 영적으로는 갈대아우르에서 떠날 때 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점차 현실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없으니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기독교인이 눈에 보이도록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를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내가 믿는 기독교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래서 의심이 들고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반대의 뉴스가 나오면 좋아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우쭐할 것입니다. 내가 먼저 믿었던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해 질 것입니다. 이 또한 믿음이 없는 자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지금 아브람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아브람의 현실에 정확하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서 아브람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서 아브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두렵고 떨리는 아브람에게 이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북방 4개국 연합군의 세력이 다시 쳐들어와서 나와 내 가문을 멸절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아브람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주신다고 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주십니다. ‘강하고 능하신 여호와시며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 24:8)께서 방패가 되시니 외부의 어떠한 침략과 위협으로부터도 안전한 것입니다. 그 방패가 오늘날도 영원히 성도의 방패가 되십니다. 그러니 어떠한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여도 겁낼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상품을 선택할 권한이 있다면 당연히 최고로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온 우주에 여호와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에게 임한 ‘상급’은 최고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상급이 되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이렇게 큰 위로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임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던 아브람은 그 위로의 말씀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안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2절에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방패가 되고 상급이 되시는 ‘주 여호와’께서 대적들로부터 보호해주시고 많은 물질로 풍요롭게 해주셨지만 현재 나는 자식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한탄이 섞인 고백입니다. 제 아무리 건강하고 명예로운 인생이지만 후사가 없기 때문에 나의 가문은 이대로 끝이 나게 될 것이니 도대체 이전에 하신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물음입니다. 그래서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는 투정에 가까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마음은 3절에서 더 정확하게 나타납니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라는 말은 자신의 현재 처지가 다 하나님께서 후사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불평인 것입니다. 원어의 느낌을 좀 더 살려서 해석을 하면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입니다. 당시 아브람의 나이가 80을 넘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 것도 아니고 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간 것인데 지금까지 후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많은 후손을 달라고 했던 것도 내가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인데 그 약속도 지금까지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브람의 이러한 항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자신의 사고와 생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이 인간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 책임을 전가한 후에 자신 마음대로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브람의 집에서 길리운 엘리에셀으로 하여금 후사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에셀은 믿음이 있고 경건하며 신뢰할 만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는 될 수 없습니다. 아브람의 몸에서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는 이미 그 몸을 통하여 나오게 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람은 그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함과 동시에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후사를 정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지금 아브람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4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신임하고 신실하게 생각하는 엘리에셀이 후계자가 아니라 아브람의 몸을 통하여 날 자가 ‘후사’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어 두려워하는 아브람이었습니다. 인내가 없어 자신이 세운 계획으로 하나님께 항변하는 아브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다시금 언약을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엘리에셀이 후사가 아니라 아브람의 몸에서 나는 자가 후사라고 하셨습니다.
5절에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상 중에 임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의 아브람을 인도하여 밖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현현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실제의 삶을 주도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현상으로 하나님을 제한하려 하거나 단정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일도 하시며,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나도 세밀하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과 친밀하고 분명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는 첩경임을 알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 중에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위로하여 주시고, 불평하며 투정하는 아브람을 부드럽게 인도하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 별들을 통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총으로 인하여 아브람이 마침내 하나님을 믿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믿음’이라는 단어가 쓰여 졌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80세라는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한계를 초월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순간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북방 연합군이 보복하러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평안해 졌습니다. 인간적으로 나이가 많은 한계와 아직도 후손이 없다는 절망과 원망으로 가득한 아브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초월하여 여호와의 약속만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욕하고 온갖 인간적인 증거와 사상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우리의 인생이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앞으로도 별로 희망이 없어 보여도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나를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만을 신뢰하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기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 믿음을 여호와께서 의로 여기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의가 됩니까? 훌륭한 인품과 도덕적인 생활 태도가 있으면 의로운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좋은 사람일뿐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웅적인 일을 하고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사람이 의롭습니까? 아닙니다. 멋있고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있어도 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그럼 어떠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만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람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람이 선한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용맹하게 북방 4개국 연합군을 격파하여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었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좋은 일 많이 하고, 검소하게 살며, 늘 좋은 사람이라고 칭송받는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브람이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믿음은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성경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가까이 하며 늘 묵상할 때에 우리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신뢰하며 삶의 분명한 준거로 삼으면 반드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말씀을 통하여 믿음의 고백이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7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향한 목적을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브람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땅을 주시기 위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셨습니다. 당시에 아브람은 한 뼘의 땅도 없이 이리 저리 유리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강대한 나라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현재 우리는 아브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아브람보다 강대하고 유명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저들의 이름과 존재는 역사 속에서 이미 사라졌습니다. 오직 아브람만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별과 같이 빛나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아브람을 선택하신 여호와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러한 확신 가운데 거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임하여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을 여호와께서 의롭게 여겨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통하여 분명하게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선민을 구원하는 일에 쓰임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는 사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하여 선택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나간 시간과 공간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또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지, 또 얼마나 한심하고 죄악된 상황에서 머물렀는지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금 언약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떠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임합니다. ‘두려워말아라! 나는 너희의 방패이며 너희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환경과 조건으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성도를 근심하게 하고 떨며 괴로워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습니까? 사실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며 떨고 있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평강을 누립니다. 그리고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오늘은 교단적으로 지키는 S.F.C. 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살아계신 여호와의 말씀을 가까이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의 앞길이 형통합니다. 저들의 존재 목적을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분명한 기독교적 인생관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신뢰하는 경향의 성도가 되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오늘의 가나안 땅을 차지하시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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