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4일 주일예배 설교
이사야 25:6-12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은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에서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지는 해방의 그 날이 오면 종로에 있는 보신각의 종을 머리로 들이받으면서 울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가 깨져서 죽게 되더라도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이겠다고 노래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기만 하면 자신의 ‘한’은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해방의 날을 기다리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방의 그 날, 기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7~80년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백성들은 독재 정권, 군사 정권이 물러가고 국민이 주인 되는 민주정부를 기다렸습니다. 독재자에 의하여 인권이 말살되지 않고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기쁨의 그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 우리 조국은 더 이상 독재의 나라는 아닙니다.
일본의 압제를 받는 암울한 시기에서 해방의 나라를 염원하였던 사람들이나, 독재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하였던 사람들이나 마침내 그 날이 이르렀을 때에 각자의 자리에서 기쁨과 행복의 잔치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었고, 충분한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해방의 기쁨은 이어지는 혼돈과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아수라장속에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독재는 비록 사라졌지만 그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하여 아직도 완전한 만족의 상태는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각 개인이 간절히 바라고 기대하는 ‘그 날’은 불완전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만족하며 기다리고 고대하는 ‘그 날’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실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날’은 다릅니다. 반드시 올 뿐만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모든 사람을 만족케 하시는 기쁨의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도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그 날’을 기다리며 힘차게 전진해야 합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이 있어도 반드시 ‘그 날’이 오고야 만다는 굳센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 이상의 눈물과 고난이 없는 여호와의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신자가 해야 하는 사명완수를 위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에는 이 땅에서의 모든 일에 대한 위로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상한 심령들이 고대하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는 참으로 풍성하고 즐거운 시간입니다.
6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이기 때문에 즐겁습니다. 독재자나 불의한 자가 베푸는 잔치는 아무리 많은 음식이 있고, 흥미 있는 순서들이 있어도 즐겁지가 않습니다. 북한에서 열리는 축제에 초청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즐거울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한 쪽에서는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으며, 압박과 고난을 받고 피눈물을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눈물과 아픔이 있는데 어떻게 태연하게 저들이 베푸는 잔치에서 먹고 마시며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양심이 있고 상식이 있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독재자와 같이 불의한 자들이 베푸는 잔치는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공의롭고 진실하며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앞선 4절에 “빈궁한 자의 보장이시며 환난 당한 빈핍한 자의 보장이시며 폭풍 중에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힘들고 지치고 상한 자들의 피할 곳이 되시며, 힘이 되시고 환난 중의 도움이 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참으로 즐겁고 기쁜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만민을 위하여’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또한 그 잔치가 ‘만민’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 태초부터 작정하시고 부르시기로 예정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참석하는 잔치입니다. 누구는 불러주고, 누구는 제외되는 그런 잔치가 아닙니다. 일부만 참석하는 잔치는 제외되는 사람도 아쉽고, 참석하는 사람도 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즐기지 못하지만 모두가 참석하는 잔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기에 정말 기쁘고 즐겁습니다. 참석하지 못하는 누구를 생각하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국 잔치에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가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온갖 좋은 것이 풍성한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최상의 것이 준비되고, 더러운 것이 제거되며, 결코 부족하지 않는 최고의 잔치가 여호와를 믿는 백성들에게 제공되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풀어주시는 잔치에는 최고의 음식과 함께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7절에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 기쁜 잔치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가리워진 면박’과 ‘덮인 휘장’을 제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표현된 ‘면박’과 ‘휘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영적인 어두움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을 의미 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절에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하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불완전한 지식, 분명하지 않는 의미로 인하여 혼돈한 상태가 ‘그 날’의 잔치에서는 완전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며,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면박과 휘장이 우리의 죄와 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그 잔치에 참석하는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영향력에 있지 아니하고 온전해 진다는 뜻입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우리를 억누르고 위협하였던 죄와 사망의 권세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그 순간에 완전히 제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은 슬픔과 고통과 번민의 근원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호흡하며 살아가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온전한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탄의 도구였습니다. 온 인류는 이러한 ‘죄와 사망’으로 인하여 고통과 눈물로 인하여 하루하루 지내왔습니다. 그러한 슬픔과 아픔을 단번에 영원히 소멸하시는 것이 바로 ‘가리워진 면박’과 ‘덮인 휘장’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를 이루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이 잔치가 끝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여전히 걱정과 근심이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잔치는 진정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잔치가 될 수 없습니다. 현실로 돌아가는 일로 인하여 생각하고 처리해야 하는 걱정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밤 12시가 되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고 다시금 잿구덩이로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는 지금 아무리 멋진 왕자와 화려한 궁정의 잔치에 있어도 늘 불안합니다. 아니 그 잔치가 화려하고 즐거울수록 신데렐라의 고민과 염려는 비례하여 깊어질 것입니다. 12시가 되기 전에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두려움의 근원인 ‘죄와 사망’을 제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더 이상의 아픔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이 옥죄이는 세상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죄와 사망을 영원히 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더욱 즐겁고 풍성한 은혜의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끝이 있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에 돌아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8절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죄로 인하여 찾아온 ‘사망’은 인류의 존재하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사망’의 공포는 우리를 시험에 빠지게 하였으며, 사탄의 종노릇하게 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날마다 서로를 의심하고 억누르며 각자의 이익만을 위하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과 성품은 간데없고 사소한 것으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죽이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빼앗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죄악된 습성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수치와 치욕으로 울었습니다. 더 가지지 못하는 분함과 힘이 없어 빼앗기는 억울함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의 근원인 죄와 사망을 여호와께서 ‘영원히 멸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씻어졌으며 부끄러운 수치가 제하여졌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조국의 독립이 이루어졌을 때, 독재의 공포에서 해방되었을 때에 모든 백성이 울었습니다. 그 동안 억눌렸던 공포와 아픔과 고난과 모욕을 이제는 더 이상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에서 흘리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쁨의 눈물도 소중하지만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백성들의 눈에서 흐르게 될 것입니다. 그 눈물은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흐르는 안도의 눈물입니다.
암혈과 토굴에서 숨죽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살았던 신자들의 눈에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으로 인하여 순교의 피를 흘렸던 신자들의 눈에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세상의 부와 권력을 뒤로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살아왔던 신자들의 눈에 눈물이 흐를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고백한다는 이유로 인하여 당하는 온갖 종류의 모욕과 조롱을 이제는 더 이상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다.
각기 저마다의 생각과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거룩한 교회가 상처를 입는 일로 인하여 흐르는 눈물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눈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씻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당한 모든 수치를 제하여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지하는 신자들이 ‘그 날에’ 받는 축복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자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잔치에 바로 이러한 위로를 받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입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기막힌 현실에서 아픔의 눈물을 흘리지만 ‘그 날에’ 주실 위로를 생각하며 인내하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에는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찬송의 고백이 있습니다.
일본의 억압에 고통스러워하던 우리 민족에게 ‘봉선화’와 ‘아리랑’은 그야말로 함께 부르며 눈물을 흘리는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부를 때에 지나간 한 맺힌 세월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아픔이 없는 해방된 조국에서 살고 있음으로 인한 감격의 눈물도 함께 흘립니다. 이처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의 눈에 흐르는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그 감격과 환희의 날에 모든 성도는 함께 고백하는 찬송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찬송입니다.
9절에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그 날에’라고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백성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구별하여 구원하시는 기쁨의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은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받았던 모든 고난과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을 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와 사망으로 인하여 아픔과 고통과 질고를 겪지 않아도 되는 참 해방의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이 오면, 그 날을 경험하면 우리는 이 놀라운 은총의 날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와 감격의 찬송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사라지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고백적 찬송입니다. 악한 권세를 그 약속하신대로 완전히 멸망시키시고 자신의 백성을 의와 공평의 나라로 회복시킨 은총의 하나님을 향한 감격의 찬송입니다.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신자의 분명한 찬송이며 신앙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암혈과 토굴에서 숨죽여 예배를 드리는 신세이면서도, 세상의 악한 자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지킨 결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신실하심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달콤한 명예와 권력과 재물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여호와의 율법을 목숨 걸고 지킨 결과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시며 우리의 수치를 제거하여 주셨습니다. 그 은총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에 감격하여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를 미련하고 우매하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결국에는 그러한 모든 자들의 생각이 틀리고 우리가 바른 길이었다는 확신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시라’고 찬송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가 기다린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바로 이가 ‘여호와’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세상의 영웅이나 호걸이 아니라 만군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고 찬송하였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이 있는 종교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심이 있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세상에서 영원으로 옮겨지는 구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아픔과 고난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구원을 주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기뻐할 것이 없는데 기뻐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즐거울 일이 없는데도 상상으로 즐거워하라고 하는 사이비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반드시 구원하여 주시며 더 이상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이 없는 실재하는 천국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약속이 있는 참 종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그 이름을 인하여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이 세상의 신자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막해 보이는 현실 앞에 슬퍼하거나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온전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그럴수가 있습니까? 우리 신자에게는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에서 ‘그 날에’ 우리의 눈에 흐르는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하고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있는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그 날에’ 그 잔치에 참여하여 구원의 하나님을 향하여 목 놓아 부르는 찬송을 고백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잔치의 날에 악인은 심판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악인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인이 우리를 우습게보고 이용해도 보복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하여 주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사람으로는 정말로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해야 합니다. 그 모든 일의 신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날에’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 심판을 기다리며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참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또 구원을 받을 자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로 저들 중에 회개하고 돌아올 자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내와 선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악한 일을 행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의심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고 우리의 선한 행실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믿음으로 인내하고 선을 행한 신자에게 잔치를 베푸시는 ‘그 날에’ 악인에게는 심판이 있습니다.
10~12절에 “여호와의 손이 이 산에 나타나시리니 모압이 거름물 속의 초개의 밟힘 같이 자기 처소에서 밟힐 것인즉 그가 헤엄치는 자의 헤엄치려고 손을 폄 같이 그 속에서 그 손을 펼 것이나 여호와께서 그 교만과 그 손의 교활을 누르실 것이라 너의 성벽의 높은 보장을 헐어 땅에 내리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압’은 악의 무리를 대표하는 이름입니다. 오늘날 신자를 향하여 핍박하고 억누르는 ‘하나님의 대적’들을 총칭하는 이름입니다. 그 ‘모압’이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인하여 자기 처소에서 처절하게 짓밟히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을 부리던 자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의하여 멸절 당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바벨탑과 같은 요새를 만들었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그러한 성벽의 높은 보장을 단숨에 헐어 진토와 같이 철저하게 파괴해 버리십니다. ‘그 날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반드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오는 ‘그 날에’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승리의 잔치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송하는 자리에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날’이 속히 임할 줄을 믿고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 날에’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오늘도 우리가 해야 할 사명된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늘의 ‘모압’은 택한 백성인 우리들을 유혹하고 넘어트리려 하지만 우리는 저들의 길이 ‘그 날에’ 반드시 멸망이며 진토와 같이 파괴 되리라는 진리를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저들과 함께 교만과 오만의 자리에서 방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일 모레 사형 당하게 되는 죄수임을 알고도 그와 같이 동맹하며 그가 하는 일을 따라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의 잔치에서, 이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완전하고도 영원한 복락을 맛보기로 약속된 자들입니다. 이 분명한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오늘도 사명자의 길을 가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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