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25일 주일예배 설교
에베소서 4:11-16
에베소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3장에서는 교리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고, 4~6장은 성도의 생활과 관련된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의 첫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아주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하여 성도가 된 것입니다. 나의 공로나 선택에 의하여 성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원칙이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결정을 하든지, 그 결정에는 분명한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즉 ‘내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느냐!’하는 것입니다. 나라의 부름에 따라 군인이 되었다면 그 군인은 자신의 개성이나 생활 습관을 고쳐서 군대가 요구하는 생활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에 의하여 천국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세속적이고 죄악 된 생활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새로운 생활 태도는 바로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를 가지고 성령님이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신 것을 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그 분량대로 선물 즉 은사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주신 은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여 교회를 세우는 일에 사용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합당한 생활 태도를 배우고 익히며 그 받은 은사로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에게 그에 맞는 직분을 주셔서 온전케 하심으로 교회를 세우십니다.
11절에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는 그 중요성이나 서열에 대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주어진 대표적인 직분들입니다. 굳이 여기에 일일이 언급되지 않는 다른 직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모든 직분들은 그 어느 하나 소흘히 취급되거나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 받은 직분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각각에게 필요한 분량대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받은 직분을 소흘히 여기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때로는 교만하거나 때로는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합당치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직분을 주신 그리스도의 선하신 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성도 각인에게 그에 합당한 직분을 주신 것은 그 성도를 온전케 하여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려 하심입니다.
12절에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성도를 온전케 하며’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재료와 목수를 섭외해야 합니다. 좋은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재를 발탁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행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일들은 잘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먼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각자의 분량에 맞는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직분을 통하여 온전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이라는 말은 ‘원래 있던 제자리로 되돌리다’는 뜻입니다. 탈골된 뼈를 제자리에 맞추어 넣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뼈와 근율이 제자리에서 잘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주신 직분이 아닌 다른 일을 하게 되면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뼈가 뿌러지고 어긋난 것처럼 고통과 괴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온전한 성도의 삶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질이 원하는 길로 가야합니다. 그 길은 세상이 원하는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욕심과 내 정욕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온전한 성도가 되면 그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봉사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일은 받은 은사를 통하여 이루어질 때에 아름다운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위, 개인적인 성품과 열정을 가지고 교회의 일을 하려고 하면 온전한 봉사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교회답지 못하게 만들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먼저 선행되어야 올바른 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도 각자에게 은사로서의 직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직분을 통하여 성도가 온전케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의 일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나, 어느 한 직분자를 통해서 온전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진 귀한 직분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에 그들의 희생적이고 아름다운 봉사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어느 한 직분이라도, 어느 한 과정이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지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거나 교만해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필라 경향교회를 이루는 모든 성도에게는 그 각각의 구성원 모두에게 주어진 귀한 직분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자로, 어떤 성도는 재정을 맡은 자로, 어떤 성도는 기도하는 자로, 어떤 성도는 심방하는 자로, 어떤 성도는 약한 자를 돌보는 자로, 어떤 성도는 시간을 드려 봉사하는 자로, 어떤 성도는 사랑으로 돌보는 자로, 어떤 성도는 묵묵히 서로의 약한 부분을 감당하는 자로 봉사하도록 우리 주님께서 각자의 분량에 합당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어떤 성도의 봉사가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성도의 봉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아무도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것에 절대로 개의치 말고 주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봉사해야 합니다. ‘나도 저런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싶다!’라고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나도 저런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있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틀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주신 은사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경향의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주신 귀하고 고유한 은사를 기쁨과 은혜로 즐거이 받는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주신 필라 경향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도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언행일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말과 그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우리는 신뢰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여기에 더하여 ‘신행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속마음과 말이 일치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북에서 온 간첩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상은 감춘 채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을 말을 하며 그 말에 따른 행동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간첩은 ‘언행일치’는 하고 있지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사상과 말이 그 순간에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행일치’는 전혀 다릅니다.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이 세상의 핍박과 고난에도 자신의 삶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본이 주장하는 왕에게 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믿는 신앙과 자신의 행동을 일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진 핍박과 고문에도 자신의 삶을 변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행일치’의 삶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바로 그 ‘신행일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됩니다.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했습니다.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지식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의 지식을 신뢰하는 것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교회당 문을 나서면 세상의 방법과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주일에 말씀을 들을 때에는 아멘이라고 해놓고 가정과 직장과 기업에서는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자신의 고집대로 가정을 이끌고, 자신의 상식과 세상의 전통대로 직장 생활을 하고 기업을 운영한다면 이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않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온전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온전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 사람이 바로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성한‘이라는 말은 ’성숙하다‘는 말입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외부의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원래의 소신과 목표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지니고 있는 완전한 충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까지 성도는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고행이나 명상을 통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각자가 다르고 그 지향점이 다 다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평생 동안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향해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신 십자가를 향해 가야 합니다. 그러면 헛된 길로 가지 않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앞선 13절의 ‘온전한 사람’과 대비되는 말로 ‘영적으로 미성숙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어른과 달리 어린 아이는 속임수와 각종 유혹에 쉽게 말려서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만 따르는 ‘온전한 사람’이 되면 영적인 속임수나 이단과 궤휼의 사설에 넘어가지 않고 이겨내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린 아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
‘궤술’은 ‘속임수’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시장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야바위’판을 벌렸던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상식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러한 ‘야바위’가 사람을 홀리는 속임수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근처에도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쉽게 돈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기웃 거리다가 돈도 잃고 마음도 다치고 삶이 피폐해 지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각종 복권이나 아틀란틱 시티나 라스베가스에 마련된 도박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벼락에 연속해서 두 번이나 맞을 확률보다도 더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혹시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으로 계속하여 거기에 맛을 들여 패가망신하는 것은 우리의 성정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귀가 이러한 간사한 유혹과 궤술로 성도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고 기도로 호흡하지 않으면 이러한 마귀의 술수에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 교회를 해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로 자신도 모르게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온전한 사람’은 넘어가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어린 아이’의 경우에는 아주 쉽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진리이신 성경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씀에서 떠나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통하여 믿고 진리 가운데 행하게 되면 그 어떤 세상 교훈의 풍조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사랑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말하며 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해야 합니다. 사랑이 없이 전하는 진리는 삭막합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충만하여 전하는 진리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성도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범사에’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에는 그리스도를 닮고 어떤 일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항상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성품이나 인격, 행위에 있어서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나는 원래 성질이 이러니까! 나는 복잡한 것은 싫으니까! 나는 한 번 싫어하면 끝까지 싫어하는 성격이니까!’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고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성도는 이러한 변명으로 자신의 삶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뼈를 깎는 아픔으로 옛 사람의 모습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자신의 성품과 변명과 합리화하려는 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해지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온전해지게 될 때에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날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모든 세상의 교훈과 헛된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16절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서로가 도움을 입고 연합하여 자라고 튼튼하게 되듯이 한 교회에서 지체가 된 각각의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를 다르게 인식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섬기는 교회를 온전히 세워지게 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나 혼자 잘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온전하게 자라가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서로 돕고 위하여주는 일들을 통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 각 개인에게 그리스도께서 그 분량대로 각각의 은사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오직 그리스도에게까지 온전히 자라야 합니다. 그렇게 온전하여진 성도들 간의 연합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어떤 유혹과 사람의 궤술에 빠지지 않고 요동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히 받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는 성숙한 성도가 되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합당하게 쓰임 받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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