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성령의 위로

Posted on 20 Oct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10월 20일 주일예배 설교
사도행전 9:23-31

아무리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여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역경과 풍파를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족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가족도 자신을 다 이해해주지 못하고 오해하며 힘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맞다고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맞는 일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나라와 민족과 개인이 이토록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분열되어 싸우고 헐뜯는 것은 각기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오해하며 잘못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분쟁이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이며 인간세상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만이 옳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비록 그 길이 세상이 반대하고 싫어하는 길이지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 성령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진심으로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위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 위로가 있기에 힘차게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 위로가 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서 감격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1. 세상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갈 때에 수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 길에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범죄 조직의 일원으로 있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경찰에 자수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자백한다면 그 조직에서는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려 할 것입니다. 일단 조직이 위험하기 때문이며, 그런 사람을 그대로 놔둔다면 제2 제3의 이탈자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조직원이 되었다가 어떤 이유로든지 이탈하는 사람은 평생 동안 불안하고 쫓기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그 이탈자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일수록 조직의 추격은 거세집니다.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배신감도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울이 그러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원래 사울은 유대인들의 막대한 후원을 받으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한 순간에 그 입장을 완전히 바꿔서 오히려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인하여 사울은 세상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면 그동안 사울을 믿고 후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몸서리쳐질만한 배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조직을 이탈한 것만도 용서할 수 없는데 오히려 그 창을 뒤로 돌려서 자신들을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배은망덕한 사울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결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가려 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하게 핍박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23절에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여러 날’이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하여 또 다른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는 갈라디아서 1:17을 참조해 보면 3년의 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직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3년에 걸쳐 기도, 말씀 연구, 영적 체험, 전도와 같은 영적인 경험들을 하고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여기서 ‘지나매’라는 뜻은 ‘채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3년에 걸친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고 지나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며, 영적인 새로운 방향성을 찾으므로 이제는 예전의 박해자가 아닌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 그에 합당하게 채워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각오로 다메섹으로 돌아온 사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어제의 동지였던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된 박해였습니다.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던 유대인들은 사울의 회심과 전도를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유대교에 대한 배신으로 보고 응징하기로 한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배신자에게 해당하는 벌을 내리고, 동시에 유대인 사회로부터 더 이상의 이탈이 없도록 경고의 표시로 사울을 응징하기로 한 것입니다. 특히 이들은 사울을 잡기 위하여서 공권력을 사용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4절에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바울의 고백이 고린도후서 11:32~33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레다 왕의 방백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방금 읽은 24절에서도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도 아닌 타국에서 외국인이 성문을 지키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이는 분명 당시 성을 지키는 관리들을 매수하였거나 어떤 계략을 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울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방백들이나 권력자들이 핍박하려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을 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사울이 이 다메섹에서 잡힐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무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길을 가는 사명자들은 그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은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한 사명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25절에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성벽 위에 집을 짓는 것이 흔했습니다. 성벽 꼭대기에 한 층을 덧붙여서 그 공간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사울은 이러한 집의 창문을 이용하여 다메섹을 무사히 탈출한 것입니다. 과거 구약 시대 기생 라합도 이러한 방법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성벽 위에서 내려 보냈습니다. 이 때부터 시작된 사울의 인생은 그야말로 수도 없는 박해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보다 더한 고비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와 은혜로 그 모든 죽음의 고비들을 넘겼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사울이 특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울에게 있는 사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선 15절에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채 펼치기도 전에 다메섹에서 유대인들과 방백들에게 사로잡혀 그 생을 마감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1세기 유럽과 아시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사울에게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협과 어려움 속에서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 일만 주시고 모른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늘 함께 동행 하시면서 우리가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시고 도움도 주시는 것입니다. 맡기신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그 사명이 다하면 친히 부르셔서 영원토록 영광 가운데 거하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이 ‘사람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까지 결코 죽지 않는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숨 쉬는 것은 아직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히 그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때와 환경이 어렵다고 불안해하거나 놀지 마시고 주님 안에서 항상 안심하고 즐겁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시고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사명을 감당하지 않고 내 욕심과 내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일 때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숙제는 하지 않고 놀기만하는데 그런 자녀를 가만히 두고 보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로 타일러도 안되면 매를 드는 것입니다.
사울은 잘못된 방향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옳은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쳐와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정문으로 나가지 못하고 광주리에 담겨서 탈출하는 극한 상황이 와도 이것이 사명을 완수하는 바른 길임을 알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메섹을 탈출한 사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3년 전에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위풍당당하게 떠났던 사울이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자신에게 닥치는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여지없이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초라한 인생입니다. 같이 동문수학했던 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사울의 집안이 속한 가문의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또는 아주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사울은 몰락한 신세가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의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야말로 생명을 얻고 당당히 돌아오는 사명자 사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변화된 사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기도 했지만 그러한 변화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도 그와 교제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변화를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울을 믿고 사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스승 사울을 위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위로입니다. 세상이 몰라주고, 지금까지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온갖 거짓말과 모략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주의 길을 가는 사명자에게는 그를 신뢰하고 따르며 그를 위해 온갖 어려움도 감당하고자 하는 신실한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러한 위로가 있기에 오늘도 사명자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2. 성도간의 교제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에 한 사람을 통한 성령의 위로가 있습니다.

26절에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사울은 분명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몸담았던 유대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로부터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이전의 행적이 안좋았으면 그랬을까요? 분명 사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교인들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과 친밀한 교제를 함으로 이제부터 시작될 자신의 복음 전파 사역에 더욱 효과적으로 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사귀고자 하나’라고 할 때의 ‘하나’는 ‘시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을 시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사울이 제자들과 교제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계속하여 그들의 신임을 얻기 위하여 사울이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유산은 이렇게 항상 현재에서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이 자신의 지나간 행적 때문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계속하여 자신의 진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언젠가는 이러한 진심이 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지 않더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중단하지 말고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노력이 열매를 맺는 데에는 ‘바나바’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27절에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회심한 직후에는 ‘아나니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루살렘에서는 ‘바나바’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바나바’는 자기 소유의 토지를 팔아 진실하게 헌금하여 하나님 나라에 많은 유익을 끼쳤으며, 자신도 그에 걸맞는 행실로 초대교회 많은 성도들의 신망이 두터운 자였습니다. 그런 바나바가 지금 사울의 보증인이 되고 있으며, 소개자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떤 사람을 소개하고 보증인이 되어 준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악명 높은 사울입니다. 그런 사울을 소개하고 변호하는 것은 인간적인 동정이나 의리로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사울의 교제는 바나바의 도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에게 사울이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그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지난 3년 동안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어떻게 예수 이름을 전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러한 객관적인 결과가 바로 유대인들의 표적이 되어 다메섹에서 핍박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광주리에 매달려 탈출하게 되었음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사울은 사도들과 성도들의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교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했습니다.
28절에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에 출입하며’라는 것은 예루살렘 성을 자유롭게 출입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나바의 헌신적인 중재와 소개로 사울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이제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믿음의 신실한 형제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영의 교제를 시작하게 된 사울은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 제자들과 교제하며 인정을 받는 것이 사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인정은 이방인을 위한 선교에 효과적인 동력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9절에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또’라고 했습니다. 회심한 직후에 다메섹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당황하게 했던 사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라비아로 가서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던 사울이었습니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피해 극적으로 탈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사명은 계속되었습니다.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들과 토론했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다가와도 전했습니다. 생명이 존재하는 한 사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싸우지 않는 군인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싸움이 무섭고 두렵다면 전역해야 합니다. 병을 고치려고 하지 않으면서 명성과 돈만 바라는 의사는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국민과 나라를 위하는 정치를 하지 않고 그저 표와 인기만 얻으려고 하는 정치인은 오히려 국민에게 스트레스만 됩니다. 군인은 전장에 있어야 하고, 의사는 환자를 보아야 하며, 정치인은 국민과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처럼 예수 믿는 신자는 오로지 복음 전파를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 저번에 다 했으니까 이제는 좀 쉴게!’ 틀린 말입니다. 사울은 ‘또’ 주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말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간신히 탈출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쉬지 않았습니다.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서 예루살렘 성도들과 교제하였고, 그들과 함께 하자마자 자신의 사명인 복음 전도를 ‘또’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운명이요 숙명입니다. 시험이 와도 ‘또’ 전도해야 합니다. 질병으로 힘들어도 ‘또’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시험에 들어도 ‘또’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생명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 놀고 먹으며 즐기라고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름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상한대로 엄청난 핍박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인하여 사울은 참된 신뢰를 얻게 됩니다. 바나바의 소개와 보증으로 교제하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사울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사울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울의 열정적이고 논리적인 전도로 유대교에 큰 타격이 되어서 그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사울을 도와서 고향 다소로 피신시키는 것입니다.
30절에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울을 이해해주고 도와주었던 사람은 바나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형제들’이 사울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위로입니다. 그 형제들이 사울을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고향인 다소에서 사울은 다시금 영적으로 무장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분명 표면적으로는 위험과 핍박을 피하기위한 길이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를 예수님의 환상으로 인한 일이었다고 사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울은 더욱 증가되는 사명을 준비하는 성숙된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사명자로 헌신하며 걸어가는 사울을 위하여 한 사람 바나바를 통하여 위로하여 주셨고 그 위로를 인하여 더욱 사명완수에 힘썼던 사울에게 수많은 형제들을 통하여 위로를 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길이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인내하고 묵묵히 사명자의 길을 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한 위로자를 만나 더욱 힘써 주의 길을 가면 마침내 큰 은혜로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31절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라는 말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교회 박해로 인하여 성도들이 흩어진 이후부터 빌립집사의 사역과 사울의 회심 및 그로 인한 복음 전도로 인하여 고향 다소로 피신한 지금까지의 모든 일로 말미암아’라는 뜻입니다. 그 모든 일로 인하여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해졌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원래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은 선교하고 전도할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핍박으로 인하여 어쩔 수없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니 바로 그러한 일로 인하여 교회의 수가 증가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따라 진행한 결과 부흥하게 된 것입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것이 오히려 더 큰 부흥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로 시작된 핍박은 많은 어려움을 교회에 가져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와중에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욕하며 배교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저렇게 경건한 사람이 은혜로운 설교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교회를 떠났습니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생사화복에 사로잡혀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성령의 위로가 모든 교회에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환경에 하나님의 일이 맞춰지지 않으면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교회를 등집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참을성이 없고 단호한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틀렸을 거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령의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판단과 행동으로 다 결정하고 살아가는 자에게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인내하며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성령의 위로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성령의 위로’는 구체적으로 로마 황제 칼리귤라가 황제 숭배의 일환으로 자기 초상화를 성전의 지성소에 두게 하려 하던 때를 말합니다. 이러한 로마황제의 정책으로 인해서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일을 잠시 멈추게 되었습니다. 지성소가 훼손당하는 일에 온통 관심을 두어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조직적으로 탄압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한 유대교 대박해를 통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또한 세상의 권력자를 통하여 유대교의 극심한 박해를 잠시 멈추어 각 지역의 교회가 견고하게 뿌리내리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험과 환난 그리고 각종 어려움들을 영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에게 일어나는 혹은 교회에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를 믿는 개인과 교회에는 반드시 성령의 위로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위로를 따라 순종하고 충성할 때에는 반드시 큰 부흥의 역사가 있음을 굳게 믿고 오늘도 ‘또’ 복음을 전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익명

    말씀은혜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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