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바알브라심

Posted on 29 Sep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9월 29일 주일예배 설교
사무엘하 5:17-25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그 왕위가 견고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윗은 사울 이후 왕이 되었지만 그 영향력은 남쪽에 국한되었습니다. 북쪽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남은 사울의 세력들과 몇 년에 걸친 다툼 끝에 다윗은 드디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곧 블레셋이 쳐들어왔습니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통일 왕국이 되어 강대한 세력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서 서로 싸울 때에는 적당이 이쪽 저쪽 편을 들어주면서 조공을 받는 관리를 할 수 있지만 남과 북이 하나가 되면 필시 강성해져서 블레셋을 위협하는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통합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나라의 기틀을 잡기 전, 혼란스러운 상태가 훨씬 승리의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전쟁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주권을 확립하고, 이스라엘은 진정한 독립이 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전쟁을 하면서 다윗은 그 모든 진행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순종했습니다. 이는 신본주의적인 자세입니다. 병사의 많고 적음이나 지형상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유능한 참모들과 전략적인 회의를 소집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본주의자가 가는 길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두 번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얻은 승리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을 물을 흩음같이 흩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인본주의자가 아닌 신본주의자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하나님을 중심하지 않는 인본주의자들이 점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저들과 함께 갈 수 없는 신본주의자들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선진 다윗이 걸어갔던 신본주의적인 삶의 모습을 따라감으로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1.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여호와께 묻는 신본주의의 신앙태도를 가질 때에 바알브라심의 은총이 있습니다.

17절에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고 했습니다.
블레셋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있는 곳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이리저리 찾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중심 요새인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도 다윗을 이리저리 찾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왔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아직 이스라엘을 온전히 통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도 이러한 블레셋 군대의 움직임을 듣고 곧바로 예루살렘이 아닌 ‘요해처’로 갔습니다. 당시에 최고의 요새는 당연히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요해처’ 즉 예전에 다윗이 세력을 잡고 있던 요새인 아둘람굴로 갔습니다. 거기가 제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에 다윗은 아직 완전한 통치를 하기 전에 블레셋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18절에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고 했습니다.
‘르바임 골짜기’는 유다와 베냐민 지역사이에 있는 길이가 5km, 폭이 3km 정도 되는 비교적 넓은 평지입니다. 블레셋으로서는 사울의 집안인 베냐민 지파와 유다를 가르는 것이 전술상으로도 유리하다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이곳은 비옥한 토양으로 인해 노략질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기에 여기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윗에게 불리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사울의 세력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과 북을 하나로 통일하여 나라의 기틀을 채 다지기도 전에 블레셋은 기다렸다는 듯이 쳐들어왔습니다.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습니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할 여유조차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다윗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묻는 신본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승리한 비결입니다.
19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무슨 일을 할 때에 항상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습니다. 아프면 의사를 찾고, 자녀의 공부를 위해서 선생님을 찾습니다. 도둑이 들거나 위협을 당하면 경찰을 찾습니다. 전쟁이 나면 국방장관을 찾습니다. 올바른 판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성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답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결이 됩니다. 오늘 다윗이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앞선 2:1절에서도 이미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하여 다윗은 여호와께 물었고, 여호와의 명령에 의하여 헤브론으로 갔습니다. 또한 지금도 가장 먼저 여호와께 묻고 있습니다. 참모나 장관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본주의자이기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한 블레셋과 싸우기 위하여 출정해야 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다윗은 블레셋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올라가리이까’라는 말은 공격하기 위하여 간다는 적극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앉아서 하나님이 다 하시라는 잘못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자는 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직장과 사업장에서 성실하게 일을 하고,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달란트를 활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능력을 사용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제가 가진 능력과 기회는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능력과 재주를 어떻게 사용하면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본주의자가 아니라 게으르고 비겁한 사람일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행하기에 앞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떠한 것을 원하시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자신의 모든 행동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가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여호와께서 명하시면 당연이 어떠한 전쟁이라도 승리한다는 확신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확신에 찬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병사의 수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를 주시겠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능력이 없다면 이러한 물음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빨리 가서 많은 병사를 모으고, 전략 회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 승리를 주시겠느냐는 물음을 하는 것은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을 가진 신본주의자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다윗의 손에 붙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알브라심’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20절에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고 했습니다.
‘바알브라심’이 원래 어떤 지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가 이제는 ‘바알브라심’으로 불려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돌파하셔서 흩어버리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여호와께 물었던 신본주의자 다윗의 승리는 군사력의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동행하셨기 때문에 얻은 승리입니다.
‘물을 흩음 같이’ 대적을 흩으셨습니다. 바닥에 물을 부어놓고 손으로 흩어버리면 다시 원래처럼 물이 모이지 못하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그렇게 흩어버리셨습니다.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대적을 흩은 것이 아니라 다윗의 목전에서 싸우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흩으심의 주체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된 일에 쓰임 받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전쟁의 승리로 인하여서 우쭐해지거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명명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승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신본주의자여야 합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때에도 가장 먼저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알브라심’의 축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자입니다. 자신을 믿고, 자신의 지성을 의지하고,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는 자가 인본주의자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사람을 의지하고, 재물을 의지하며, 권력자를 찾는 것이 인본주의자입니다. 성도는 매 순간 순간 마다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범죄입니다. 사울이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다윗은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 결과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본주의자가 되어 ‘바알브라심’의 복을 받는 은총이 있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면 앞서 행하시는 여호와의 역사하심으로 바알브라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21절에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고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우상을 버리고 갈 정도로 완전한 패배를 했습니다. 우상의 능력을 의심하여 버리고 갔든지, 우상을 챙길 능력이 없을 만큼 황급히 도망갔든지간에 완전한 패배를 했음이 분명합니다. 다윗과 그의 군사들은 그러한 우상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이 아니라 불태워 소멸시켰습니다. ‘치우니라’는 말은 취하는 것이 아니라 불태우기 위하여 가져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이러한 우상들은 화려한 장식과 비싼 것들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취하여 승리를 기념할 수도 있었고, 녹여서 재정적인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리품으로 우상을 취하지 말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서 모두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전쟁의 승리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임을 알기에 취한 행동입니다. 자신들이 애쓰고 싸워서 취한 승리라고 하면 그 승리의 전리품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리품으로 취하지 않고 모두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의 승리로 인하여 교만하지 않고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며 준행한 다윗에게 계속하여 ‘바알브라심’의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22절에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고 했습니다.
또다시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왔습니다.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이처럼 대적들의 공격은 끝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 번 승리했다고 해서 방심하거나, 이미 이겼던 싸움이어서 더 이상 여호와께 묻는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바알브라심’의 축복은 더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계속하여 여호와께 묻는 신본주의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말입니다.
23~24절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라고 했습니다. 이미 한 번 승리했던 적들이며, 한 번 승리했던 장소였습니다. 따라서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익숙한 작전대로 하면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도 인본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성도는 한 번 유혹에 승리하였다고 해서 또 승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교묘하고 집요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집요하고 교묘하게 우리를 넘어트리려고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 번 이겼다고 해서 방심하거나 자만하면 안 됩니다. 여호와께서 승리하게 하셨기에 또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자세한 작전까지 알려주셨습니다.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라고 했습니다. 일차 승리는 정면으로 진격하여 돌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말고 우회하여 기습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기습의 신호는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바람과 같이 운행하여서 나무 잎들이 흔들려서 소리가 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전쟁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동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신호가 오면 즉각 움직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해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 분명함을 확인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순종만이 요구됩니다. 그러한 순종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앞서 싸우심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라는 말은 하나님의 신호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여호와께서 블레셋 군대를 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내가 헌금을 많이 하고, 내가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봉사와 희생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고 튼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계명을 순종하며 매사에 여호와께 물어보는 신본주의자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 온 인생을 가만히 회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결정이나 나의 선택으로 인한 걸음은 항상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걷는 걸음은 언제나 승리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윗처럼 항상 여호와께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이고 완전한 순종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승리합니다. ‘바알브라심’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25절에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였다는 말은 즉각적인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시 한 번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 승리는 게셀까지 이르렀습니다. 게셀은 르바임 골짜기에서 24km 떨어진 곳으로 블레셋 국경 경계가 있는 곳입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이 여기까지 쫓겨 갔다는 것은 이스라엘 땅에서 완전히 멀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후로 블레셋은 더 이상 대규모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은 다 이상 나라 밖의 대적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즉위 초기에 온 이스라엘을 하나로 모으고 왕권을 강화 하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받은 ‘바알브라심’의 축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용사들과 백성들의 환호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본주의자가 취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같은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어디에 있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본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성대로 순종하고 행동하면 반드시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절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오로지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신본주의자가 되어 우리의 대적들과의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바알브라심’의 축복을 쟁취하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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