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서로 사랑하라!

Posted on 22 Sep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9월 22일 주일예배 설교
요한일서 3:13-24

사도 요한은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과격하고 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화가 나서 예수님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실 때에 자신이 높은 자리에 앉기를 간청할 정도로 정치적인 야심도 많았습니다. 그런 요한이 심령의 변화를 받은 후에는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고 했습니다. 혈기와 복수의 정신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실천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된 모습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를 믿고도 이전의 혈기와 육적인 모습이 변하지 않는다면 예수를 아는 것에 그치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위력과 권세로 인하여 정치적인 이득이나, 병 고침과 같은 기적의 열매를 바라기 때문에 동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서 신자가 많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대표적으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를 다니면 복을 받고 출세하며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다녔는데 이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으니 안 다니는 것입니다. 또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종 모습들에 실망을 느껴서 발길을 끊기도 합니다. 그 말은 교회에 사람을 보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들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였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를 더 중요시 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저들이 참된 신자가 아니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 후에 십자가에서 영광의 죽음을 허락하실 때에 저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저들은 그저 빵과 기적을 베푸는 예수를 따르는 자였지 메시야이시며 구원주이신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를 아는 자였을 때에는 혈기와 복수에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성도가 되었을 때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을 하는 거듭난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아는 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를 믿는 자입니까? 예수를 아는 자라면 예수를 알기 이전의 성격과 행실이나 예수를 알고 있는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처럼 완전히 바뀝니다. 자신을 위한 삶에서 예수를 위한 삶으로 바뀝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예수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야망을 채우려는 ‘우레의 아들’이자 야심가였지만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오로지 예수의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멸절당하기를 퍼붓는 자였으나 이제는 자신을 때리고 미워하며 욕하는 자들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이해하며 오히려 ‘서로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권면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의 진정한 삶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우리는 종교인이 됩니다. 우리는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예전의 혈기와 분노와 질투와 시기심을 불사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 진리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3절에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어린아이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 우는지, 왜 고집을 부리는지 알지 못하면 사랑하지 못하고 짜증을 내며 결국에는 미워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된다는 것은 저들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세속적인 성공을 위하여 살아갈 때에 우리는 하늘의 상급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저들이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부인할 때에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저들은 한 번뿐인 세상에서 화려하고 폼나게 살려고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천국 본향을 생각하며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사명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 길이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마귀의 영향력에 있는 자들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저들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저들이 신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신자에게 조롱과 핍박과 따돌림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니 당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떼를 쓰고, 말 안듣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왜 아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느냐고 당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들은 이렇게 당연하게 우리를 미워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저들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사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저들에게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4절에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형제를 사랑하는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행위 구원론이 됩니다. 하지만 원문의 정확한 의미는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실을 아는 것은 바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다니며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려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각종 예물과 봉사와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니라 명백히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사망에 거하는 자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그 사람을 구원하였는데 그 안에 다른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함께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는 그 마음에 영생이 없습니다.
15절에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없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움과 살인이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미움과 살인이 어떻게 같을까요? 살인은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미워하였고, 그 미움을 다스리지 못하여 결국은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없을까요? 살인은 마귀에게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마귀에게 속한 살인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시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버린 것이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이익이 되거나, 이를 위하여 내가 칭송을 받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이 희생으로 어떠한 유익도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죽음은 철저하게 이타적인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전적으로 죄인인 우리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유익이나 바램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우리 성도들은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함으로 손해가 가고, 힘들고 신경이 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 희생을 다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사랑을 알고’라고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조금도 없는 우리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신 사랑으로 인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참된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참된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7절에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했습니다.
‘궁핍’은 일상적이고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어 힘든 형제를 향하여 긍휼의 마음이 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움직이시는 작용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인간이 의지적으로 닫아버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긍휼의 마음을 인간의 악하고 이기적인 의지로 막아 버리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성도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말과 혀로만’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 실제적인 행위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말 그대로 실제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실함’은 진리에 부합하는 진실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이타적이고 헌신적인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이 있는 ‘행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갑을 열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행함’은 있지만 ‘진실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니 나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행한 것은 그 속에 진실함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라도 행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여 참되고 진실한 사랑을 알게 된 성도라고 한다면 오늘 사도 요한의 권면처럼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성도가 어찌 핍절한 형제의 사정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형식적으로 도와주고 모른 척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진실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습니다. 형제가 아프면 내 마음도 아프고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도와주고 보살펴서 빨리 회복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형제가 궁핍하여 어려운데 나 혼자 풍족하게 잘 먹고 잘 쓰며 살 수 없습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않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도우면 내가 어려울 때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도우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을 거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도우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타올라서 궁핍한 형제의 어려움과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에는 놀라운 결과가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어떤 결과를 바라고 행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천하 만민 중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행함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의 형제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참되고 바른 행함의 결과는 진리에 속했다는 확신입니다.
19절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진실한 행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는 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또한 어떤 유혹이 있어도 그 사랑의 실천을 중단하거나 변형시키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바른 행함의 결과는 담대함입니다.
20~21절에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했습니다.
법이 정한 틀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은 경찰이나 판사 앞에서 담대합니다.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행함을 하는 성도는 자신의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계명을 지킨 결과 기도의 응답을 받는 은총을 얻습니다.
22절에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기도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좋고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간구를 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거 해 주세요! 저거 해 주세요! 라고 주문을 외우면 무엇이든지 뚝딱 나오는 요술방망이가 아닙니다. 또한 그러한 간구를 들어주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에게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구는 반드시 들어주십니다. 그 기도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신을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무엇이든지 간구하는 대로 받는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킨 결과가 이처럼 큰 축복을 가져옵니다.

성도 여러분!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면 많은 좋은 것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무나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 의지와 결심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절망할 필요도 없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원래부터 작심삼일하는 사람이니까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형제 사랑을 평생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스스로 낮출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나는 누구 보다도 강한 결심을 할 수 있으니 평생 동안 형제를 사랑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자신만만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라야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라는 고백이 없으면 진실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만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24절에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과 성도가 한 몸으로 연합되어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렇게 주님의 계명을 지키니 계속하여 우리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 주님께서 거하시니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아이들에게 나쁜 습관을 없애는 방법은 ‘하지마라!’가 아닙니다. 혼내고 억압하면 눈 앞에서는 안 하는 것 같지만 왜 그럴까? 라고 생각하며 더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관심을 더 좋고, 더 재미있고, 더 유익한 것으로 유도 하면 자연스럽게 나쁜 습관들이 사라집니다. 우리 몸에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마귀가 자리를 잡을 곳이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찬송하면 우리 안에 주님이 계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온갖 악하고 추한 것들이 유혹할 때에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그 모든 것들을 이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성도를 보호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마음과 시기와 질투로 이기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내 안에 있는 세상의 악한 것들을 성령의 불로 소멸하여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고 살아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진실하게 행함으로 주 안에 거하시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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