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그에게 나아가자!

Posted on 29 Jul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7월 28일 주일예배 설교
히브리서 13:7-16

시저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로 한 결단, 마틴 루터가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로 한 결단, 링컨이 노예제도를 해방하기로 한 결단,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작전을 하기로 한 결단과 같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상의 중대한 결단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결정에 따른 무수한 고난을 감수하고 내린 결과입니다.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역사상 더 중대한 결단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위험과 고난으로 인하여 포기한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가장 위대하고 중대한 결단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죄인이 이 세상길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결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온 세상 만민들이 가는 모든 익숙한 길을 거스르는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로 가는 길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위험을 다 감수해야 합니다. 단 하나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 아래에서 죄인인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엄청난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바로 그 위대한 결단을 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그러한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우리도 그와 같은 올바른 길을 가도록 결단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에 따른 무수한 고난이 없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러한 어려움과 위협에 절대로 굴복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현실의 위협과 고난을 감수하고 믿음으로 인내한 결과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는 승리와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어지는 각종 고난과 어려움도 반드시 영광스러운 승리로 마감한다는 강한 확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수반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걱정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그 확실한 증인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선진들의 신앙을 본받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최초의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일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검증된 일을 다시 하는 것은 큰 위험과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안정되고 편안한 일이 되기까지는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였던 개척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후세의 많은 사람들이 그 달콤한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초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을 존경하며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삶을 통하여 새로운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갔던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은 히브리 출신의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를 설립하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죽어지며 헌신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교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그들의 헌신과 충성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길이 어느 정도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행적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하다’는 말은 명령형으로, 강력하게 저들의 삶의 모습들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한 결과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었던 저들의 모습을 통하여 오늘 신자가 가야하는 모범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면서 생겼던 오해와 핍박과 조롱과 비난가운데 어떻게 대처하였으며, 어떠한 자세로 본을 보여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는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그 길을 따르라는 말입니다.
‘주의하여 보고’라고 했습니다. ‘반복하여 보고 또 보면서 자세히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을 떠나 영원으로 가는 결정을 통하여 생기는 무수히 많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고 또 보아서 교훈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간직하였는지를 보고 현재 내 삶에 적용하라는 말입니다.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하고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어떻게 포기하고 믿음을 지켰는지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서워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였는지를 보고 배우라는 말입니다. 2천년전 과거에 있었던 사람들의 행적이 과연 현재의 선진 문명에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러한 배움은 과거나 지금이나 또한 앞으로도 여전히 동일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변함이 없이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천년전에 우리 믿음의 선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고 위로가 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동일한 힘과 용기를 주시며 한없는 위로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위로의 이름이 됩니다. 예수 생명의 은혜는 모든 인류에게,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변함없는 생명의 이름입니다. 이 땅을 살아갔던 모든 인간은 제 아무리 영웅적인 삶을 살았다 해도 그 시간과 그 장소와 그 주변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한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징기스칸과 알렉산더와 시저는 그 당시의 영웅이지 지금 현대인에게는 그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 정도의 의미만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더 이상 지금의 우리에게는 힘과 용기를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과 하와로 시작된 인류의 조상 때부터 현재와 미래의 모든 인류에게 여전히 구원의 이름이며, 위로의 이름이며 은혜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갔던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면 됩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교훈을 따라가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우리 믿음의 선진들만 따라 가야 합니다.
9절에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그 때나 지금이나, 또한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미래에도 진리가 아닌 ‘여러 가지’ 잡다하고 미혹하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 교훈들은 흥미롭습니다. 다양합니다. 솔깃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그리스도가 아닌 마귀에게로 인도하도록 하는 거짓 교훈입니다. 저들의 말에도 성경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신기하고 놀라운 영들의 작용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짜입니다. 성도는 이러한 ‘다른 교훈’에 끌려서 미혹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은혜로써 굳게 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성도들은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단의 미혹된 여러 가지 교훈을 간파하고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힘은 식물이 아닌 은혜라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식물’은 레위기 11장에서 말하는 ‘정결한 음식’을 말합니다. 즉 당시에 히브리서를 듣던 독자들인 히브리 출신 성도들에게 유대주의자들의 음식법과 정결법등의 율법주의가 강한 유혹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율법주의가 신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신앙을 강력하게 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신앙을 강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용도나 의도가 우리의 신앙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자각하게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도저히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도저히 그대로 살 수 없는 무익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정한 규율이나 전통은 더더욱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정한 전통, 인간이 정한 규례는 절대로 신앙의 성숙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유익을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믿음이 더해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한 전통과 규례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스스로 의롭게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올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했던 믿음의 선진들은 바로 이러한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믿음의 선진들을 따라 가야합니다. 그들의 길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갔던 길입니다. 이제 저들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두 번째 방법으로 십자가 고난을 제시합니다.
10절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를 포함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성도에게 ‘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제물’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하여 성취된 은혜를 말합니다. 이러한 은혜에는 구약의 옛 언약을 고집하는 율법주의자들 즉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1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11절에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4장과 6장에서 설명된 구약의 제사제도를 살펴보면 일상적으로 드려지는 제사의 제물은 제사장들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지만 대 속죄일에 드려진 제물은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 드려진 제물의 피는 성소에 들어가서 뿌리고 그 제물의 남은 고기는 먹지 못하고 영문 밖에서 불사르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매 년마다 드려지는 대 속죄일의 제사를 대신한 희생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대 속죄일의 제사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희생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 속죄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게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유월절 음식을 꼭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정결한 음식만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사도행전에 하나님께서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스스로 속되다 할 수 없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거룩한 희생이 되셨습니다.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가 우리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서 모든 택한 백성을 아버지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께서 자신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자세하게 설명된 그 제사 제도로는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복잡한 제사 제도는 불가능을 알게 함과 동시에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를 예표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불가능하고 복잡한 구약의 제사를 폐하는 위대하고 은혜로운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11절에 대 속죄일에 드려진 제물은 영문 밖에서 불사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문 밖에서 속죄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표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의 대 속죄일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효력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죄인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가 죄로 더럽혀진 땅에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대속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몸에 지고 그분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그리스도가 더러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한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속하여 주셨으니 이제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문 밖으로 나가는 것은 문둥병자들이나 가는 것이기 때문에 큰 수치가 됩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불합리하게 보여 지고 손가락질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수치와 비웃음과 조롱을 뒤로하고 예수를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익숙한 환경을 뒤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핍박이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단연코 배격해야 합니다. 세속주의와 물질 만능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여기는 우리 신자들이 머물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구히 머물 도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14절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13절의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합니까?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영구한 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이 세상은 우리가 영구히 거할 곳이 못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세상이 아닌 ‘장차 올 것’을 찾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익숙하고 편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떠나 어떠한 능욕이라도 감수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과 결별하여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아픔을 감수하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본향이 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자들은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자들, 십자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제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즉 이제 성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가 드리는 ‘최선의 제사’가 됩니다.
먼저 그 제사는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야 합니다. 이 말은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드릴 수 없는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됩니다. 예수 십자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는 제 아무리 경건하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거룩한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는 ‘항상’ 드려야 합니다. 이 말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하여 드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즐겁고 기쁠 때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죽을만큼 힘들고 넘어지며 상한 심령이 되어도 ‘항상’ 우리 하나님께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는 기가 막힌 죽음을 경험해도 우리의 몸에 음식이 들어가는 것처럼 그 어떤 어려운 상황과 고난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예배하는 성도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호흡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고백하며 인정하는 증인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고백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좋은 관계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는 말입니다. 또한 성도간에 참된 형제애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제를 다하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옷 입고, 좋은 차 타고, 교회당에서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예배드리는 주위의 형제들의 형편도 고려하고 도와주는 일도 역시 예배라는 말입니다. 주일날 몇 시간 예배드리고 신자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주변에 어려운 성도는 없는지, 교회당 건물에 내 손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신자의 의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붇는 것처럼 그 성과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때에 열매를 맺고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 성도의 희생과 헌신과 순종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요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유익과 안정을 뒤로 하고 오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한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결단을 한 사람들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결단입니다. 이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통하여 배움을 얻고, 그들의 신앙 고백을 인하여 위로를 받고, 그들의 낮아짐과 죽음의 헌신을 인하여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따라 그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길은 세상을 떠나는 길이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어려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능욕을 짊어지고 그에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은 영구한 도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의 영구한 도성은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 본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게로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성도는 ‘예수로 말미암아’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항상’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예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성도의 당연한 의무요 기쁨임을 깨닫고 오늘도 즐거운 마음으로 영문 밖에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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