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7일 맥추감사주일 설교
신명기 26:1-11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맥추절은 보리를 추수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러한 맥추절의 다른 표현이 있는데 초실절입니다. 초실절이라 함은 말 그대로 처음 열매를 드리는 절기 즉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초실절입니다. 이렇게 처음 열매를 드리는 것은 감사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맥추절에 처음 열매를 드리는 것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절기의 의미를 새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설교하는 지금 이 시점에 이스라엘 백성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 일어날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주관하시는 약속이기에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 5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언약이 실현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들어갈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간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음성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신자는 이 땅에서 언약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와 같은 생활의 염려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경건의 자세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십니다. 광야 40년 동안에 수도 없이 경험한 일입니다. 사막의 갈증과 추위나 각종 맹수와 독충이나, 질병과 굶주림, 그리고 목마름이 이스라엘 백성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고려해야 할 단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신자가 살아가는 동안 고려해야 할 대상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약속의 땅에서 복된 삶을 누리느냐 아니면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 빠져서 계속하여 방황하고 훈련을 받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모든 훈련을 마치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시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모세의 말을 통하여 분명한 확신가운데 경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들어갈 수 있을까 없을까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히 들어가는 것이며 그렇다면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하여 집중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여리고 성이 강대하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의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청하여 순종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 모든 소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으로 그 맏물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취한 소산의 첫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라고 했습니다.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이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얻은 모든 소산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수확의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광주리에 담을 만큼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허락하셔서 얻은 첫 소산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임을 고백하는 감사입니다. 그래서 그 예물을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대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형편과 처지대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지정하시는 곳으로 가지고 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장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됩니다. 자기 편한 방법과 자기 좋은 방법대로 드리는 것은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법과 각종 규례는 인간을 얽어매는 방법이 아니라 그 모든 순서와 각종 제의법을 통하여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분명한 고백을 드리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현대의 편리하고 다양한 문화가 파생되어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큼은 그 정신과 방법에서 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자는 항상 겸손하며 감사의 고백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예배를 평가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예배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배의 각종 순서에 인간이 드러나는 망령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든 소산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신앙 고백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소산의 맏물을 드리면서 행하는 신앙 고백을 말합니다. 가장 먼저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 그 땅에서 취한 예물입니다. 즉 그 예물이 드려지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소산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와 자비로우심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가 정한 예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은 죽을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아깝고 억울합니다. ‘내가 땀흘려 일한 것인데… 이것을 드리면 그만큼 손핸데…’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죄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참된 감사로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하는 것은 그 물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심입니다.
4절에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소산의 맏물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단에 놓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다’는 말은 ‘맡겨서 보관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책임을 가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산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가지고 와서 드리는 것은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 함입니다. 애굽에서 영원히 종살이 하면서 살아야 했을 인생들을 구원하여 자유의 몸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신 축복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건축헌금과 선교헌금을 작정하여 실행합니다. 지난 한 주간을 기억하며 예물을 준비하는 그 시간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이러한 예물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곳에서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었더라면 나는 과연 이러한 소득이 생길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감사한 마음만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드릴 수 있는 재물이 있음을 감격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예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지못해 드리게 되고, 온갖 핑계와 합리화로 온전한 예물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말에 거부감이 들고 동의할 수 없다면 떨리는 마음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감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겸손하게 엎드려 기도하여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맏물의 소산을 여호와의 단 앞에 놓으며 어떠한 신앙 고백을 했습니까?
5절에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이 이곳 저곳 방황하며 나그네처럼 떠도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렇게 좋은 땅에서 정착하여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은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없습니다. 선택 받을 만한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몇 푼의 재물이나 작은 성공에 취하여서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본래는 죽었던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신앙 고백을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6절에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라고 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여’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대적하는 ‘학대’를 당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에 의해서 핍박을 받았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당면하는 현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자신들과 반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우리들을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고백하면 신자로서 받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과 벗하여 친하게 지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7절에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하감하시고’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의 법과 제도나 인간적인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께만 모든 희망을 걸고 간구했다는 말입니다. 신자는 그래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기에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이 참된 희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올바른 판단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음성을 듣고 하감하십니다. ‘하감한다’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통찰하신다는 뜻입니다.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학대나 아픔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괴로운 상태를 나타내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하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의하여 받는 여러 가지 노역으로 인한 ‘신고’를 하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적들로 인하여 겪는 고생인 ‘압제’를 하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시기에 그러한 고통에서 견딜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때에 이르면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노역에서 극심하여 견딜 수 없을 때에 여호와께서 하감하셨습니다. 사내 아이를 낳아서 기르지 못하는 고통으로 괴로울 때에 하나님께서 하감하셔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신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에 받는 온갖 종류의 모욕과 조롱과 핍박으로 인하여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 이름이 아니면 받지 않을 고통입니다. 때로는 그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과 육체가 괴롭고 힘듭니다. 하지만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하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됩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아버지! 제 기도를 들으시고 내 모든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고통을 하감하셨다는 말은 구원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다음 고백이 바로 구원의 감사입니다.
8~9절에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인도하셨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능력이나 의지가 아닙니다.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새로운 세상으로의 인도하심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여호와로 말미암고, 여호와의 능력으로 진행되었고, 여호와의 약속이 이루어짐으로 완성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애굽으로 대표되는 세력들이 아무리 우리를 학대하고 괴롭혀도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구원하여 주심을 믿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인도하여 주셔서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으니 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가지고 왔음을 고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0절에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얻은 땅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주권적 계획과 크신 능력의 인도하심으로 주어진 땅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서 얻은 소산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집과 직장과 기업은 내가 열심히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고, 인도하여 주셔서 받은 것임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얻은 모든 소득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받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이라는 고백적인 믿음이 없으면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로 드리는 예물이 될 수 없습니다.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하는 고백으로 예물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지금 이곳에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와 여러분이 지금 여기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아니면 우리가 약속의 땅에서 소산을 인하여 감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호흡이 끊어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임을 깨끗하게 고백하여 감사함으로 소득의 맏물을 드리고 경배하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1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모든 복을 인하여’라는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인하여’라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지파이기 때문에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지 못한 채 남의 집에 우거하는 객들은 거둘 것이 없기에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도 마땅히 돌아보아 함께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받은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자신만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그 얻은 모든 좋은 것들도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과 함께 거하는 레위인과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나누며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땅히 그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맥추절을 통하여 이러한 감사와 나눔이 넘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맥추절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3년 전반기를 마감하는 맥추 감사주일에 이러한 감사와 결단이 넘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축복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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