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30일 주일예배 설교
신명기 10:12-16
미국 대법원이 ‘결혼’에 대하여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결혼이 꼭 이성간의 결합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결혼도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법칙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러한 불순종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통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손을 얹고 취임식을 하며, 청교도적인 가치에 기반을 둔 21세기 미국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여파는 실로 상당하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결정을 바라보면서 절대로 흥분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죄악이 관영한 상태로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잠시 머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통하여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인가를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요구사항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아주 명확하게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다른 의도나 모호한 뜻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오늘날에도 더욱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이행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12절 상반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네게’ 라는 표현은 ‘너와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 하나님의 요구 사항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을 찾고 변화시킴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귀한 시간에 신명기의 말씀을 통하여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명하시는 여호와의 명령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전심으로 사랑하는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12~13절에서 5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라고 했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두려워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강도나 살인자를 두려워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참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권위자로서의 두려움을 뜻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인정하고 그 권위를 존중한다면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지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럴진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어찌 하나님의 법도를 만홀히 여기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인정하고 경외하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자신들의 생각이나 논리로 인하여 함부로 변형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신명기 저자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에 대하여 가장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오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까? 진정으로 우리 삶의 주인이 되시며, 우리를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그 분의 통치가 온 우주에 미치며,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도를 행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백성은 그의 정하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그 두 번째가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쉽게 여호와의 율법을 어깁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합리화하여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불경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모든 율법을 지키는 신자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대하여 당신의 백성이 응답하기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하여 무례한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귀한 존재임을 깨닫고 속히 그 사랑하심에 대하여 응답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겨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좋은 성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서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며 이러한 모습으로 드리는 것입니까? 이 날을 기다리며, 이 날에 드릴 예물을 정성껏 준비하셨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요구에 과연 우리는 내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전심으로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섬김의 예배가 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야 참되고 바른 인격적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말은 ‘간직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그 명령과 규례를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답답하거나 제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즐거운 기쁨이 됩니다. 그 명령과 규례가 우리를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군인이 훈련을 받지 않으면 즐거운 것 같지만 전쟁이 나서 이리 뛰고 저리 뛸 때에 훈련이 되지 않은 것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에는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훈련을 받고 규율에 따라 행동하게 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생존하는 강인한 군사가 되며 수많은 훈장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군인에게 있어서 훈련과 규율을 지키는 것은 그 군인의 ‘행복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하며 결국에는 즐거운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신자는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많은 상급을 받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보면 그 분명한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입니다. 아이를 입양한 부모가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정교육도 시키지 않고, 그저 먹을 것만 주며, 아이가 하고 싶은 것만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아이를 입양함에 따르는 부수적인 이익만 취하고 그에 따른 의무는 이행하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입양된 아이를 자신의 친 자녀처럼 가르치고 훈계하며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한다면 누가 뭐래도 그들은 진정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와 참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심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토록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대한 요구를 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신자의 고난과 각종 연단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가는 길과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과 엘리야, 베드로와 바울, 스데반을 비롯하여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순교했던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저 예수 이름 간직하고 그 분만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참혹한 고통과 모욕을 당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누가 그러한 고통과 연민으로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영원한 기쁨과 소망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삶을 위하여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끝나고야 말 고난과 연단이기에 참고 인내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인생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맺고자 하시는 분명한 요구입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 영생 복락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여호와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겸손과 순종으로 섬기는 모습입니다.
14절에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의문도 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호흡하는 순간부터 호흡이 끊어지는 때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15절에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조’를 기뻐하셔서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후손들을 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회가 남달라야 합니다.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벗어나려고 만주에서 중국에서 허허벌판을 달려가며 싸웠던 독립군들이 해방된 조국의 정부 수립기념행사 앞에서 어떤 감정으로 있겠습니까? 또한 한국 전쟁 때에 도와준 수많은 우방국들의 도움을 기념하는 기념식에서 우리는 어떠한 심정으로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으로 세계 최강 이집트의 압제에서 당당하게 벗어나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광야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며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열조를 기뻐하셔서 그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택이 그들의 후손인 이들을 지금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꾸어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까지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모압 광야에서 모세의 설교를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아니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이 벅차야 합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우리의 마음에 새겨져야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이 일어난 예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온 세상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관계로 인하여 이방인들의 마음이 녹아졌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일이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착각을 하게 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스스로가 위대한 줄 알고 교만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들을 향해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에 할례’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외적인 표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증표를 가지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혈통에 따라 육체의 할례는 받았지만 그러한 할례가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그저 외식하는 ‘손할례당’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표시나 신분에 의하여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는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여야만 참되고 바른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마음에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강하게 버티는 모습을 말합니다. ‘다시는’이라고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의견을 듣지 않고 10명의 정탐꾼의 의견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려 40년을 방황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들에게 ‘다시는’이라는 말은 뼈아픈 실수를 상기하는 분명한 말씀이 됩니다.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자신의 경험과 주장을 내세워 망령된 길로 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는’ 옛 사람의 썩어질 구습을 따라 살다가 멸망길로 빠지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교만하면 안 됩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과학이나 사상이 제 아무리 신기하고 놀라워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바꾸거나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이 세상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살아왔습니다.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겸손과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결과 온 세상 만민에게 예수 이름을 높여 구원의 유일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제 신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오늘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신자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인 우리는 그 놀라운 사랑에 응답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우리에게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기쁘고 즐거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지금 우리에게 당신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은혜와 창조주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위로 교통 내주하심의 역사가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인격적인 관계와 겸손과 순종의 도를 잘 지켜 행함으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영원한 행복의 삶을 누리기로 결심하는 경향의 성도들
또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선택으로 되어진 관계입니다. 우리 편에서 택함을 받을 그 어떤 조건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없는 감사와 영광으로 감사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겸손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요구하심을 잘 기억하고 끝까지 지킴으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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