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합심기도!

Posted on 09 Jun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6월 9일 주일예배 설교
사도행전 4:23-31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올라갈 때에 나면서부터 일어나지 못하게 된 장애로 인하여 성전 문에서 구걸하던 사람을 만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불쌍한 사람에게 금과 은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몇 푼의 돈이 필요했지만 진실로 필요한 것은 걷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세상이 우리를 주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저들을 영생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진실로 저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선포에는 세상의 핍박이 따라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사단이 이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이 놀라운 일로 인하여서 당시 기득권자들인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저들은 사단의 조종을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고 석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고 선포되는 일은 그 어떤 협박과 고난에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운동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행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핍박이 이미 구약을 통하여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더욱 전진할 것을 다짐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합심기도의 내용을 기록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교회가 박해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역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기도하는 성숙한 교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생기면 기도해야 합니다. 내 경험과 생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오늘 제자들의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죽게 될 것으로 생각했던 베드로와 사도들이 돌아오지 매우 기뻤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고 축하를 할 법도 한데 가장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합심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인생에 변화가 생기거나 중대한 기로에 서있을 때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묻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하신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 혹은 교회에 일어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합심기도를 통하여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합심기도는 하나님의 주권 역사를 찬양하는 기도입니다.

23절에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석방되자 바로 그 동류에게 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동류’는 ‘같은 무리’ 혹은 ‘특정한 사람에게 속한 집단’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르기로 결심한 무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동류들에게 갈 수 있었던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이는 장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같은 고난에 처해 있지는 않더라도 베드로와 요한을 위해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바로 그 동류들에게 찾아 간 이유는 위로를 받기 위함도 아니며, 이제 박해가 오니 피하라고 알려주기 위함도 아닙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에게 붙잡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상황이 변한 재판의 결과를 알려 줌과 동시에 다가 올 산헤드린 공회의 판결에 굴복하지 말고 더욱 복음 전파에 힘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이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의도는 정확히 적중했습니다.
24절에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라고 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무엇보다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였음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심으로’라는 말은 ‘함께’, ‘동시에’라는 뜻과 ‘열정’, ‘열망’의 단어가 합쳐져서 ‘하나의 열정으로’, ‘일치된 마음으로’라는 뜻이 됩니다. 그 수가 몇 명인지가 아니라 모인 사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기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두 마음을 품거나 편이 갈라지지 아니하고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리를 높여’라고 했습니다. 열정적으로 기도했습니다. 통성기도라는 말입니다. 전심전력으로 기도하니 자연히 소리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다른 상황을 고려할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때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입니다. 지금 밖에서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하는데 숨죽여 있기는커녕 소리를 높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확실하게 믿고 따르는 신자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처음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의 실체를 정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모든 과정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주권자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합심기도의 처음 고백이 왜 ‘대주재’일까요? 지금 하루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다시 협박과 위협으로 점철된 불법적 재판 과정을 겪고 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그들을 애타게 기다렸다가 마침내 석방된 그들로부터 모든 정황을 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드린 기도의 처음 단어가 바로 ‘대주재’라는 사실은 비록 눈에 보이는 세상이 로마제국, 혹은 산헤드린 공회원들로 인하여 다스려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현상 너머에서 실제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분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라는 신념의 표출인 것입니다. 지금 비록 우리는 알지 못하여 두렵고 떨리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허용하신 범위 안에 일어나는 일임을 전적으로 고백하는 단어가 바로 ‘대주재’라는 말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책회의를 먼저 하지 않았습니다. 비상 연락망을 가동하고 앞으로 모임을 줄이고 지하로 잠적하자는 실질적인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통치자이시며 주관자이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보고 현실인식이나 상황을 잘 모르는 광신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까요? 과연 지금 저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상황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저들은 분명한 상황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5~26절에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핍박이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견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열방’은 유대 민족을 제외한 이방 국가를 말하는 것이고, ‘족속들’은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열방’인 로마로부터 수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족속’인 동족으로부터도 핍박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시편 2:1~2절의 인용입니다. ‘세상의 관원들’은 ‘열방’과 같이 로마의 세력을 말하며, ‘관원’이라 함은 ‘족속들’로 대변되는 유대의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시편 2:2절에서는 ‘주와 그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상의 군왕들과 관리들이 대적한 대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를 믿고 전하는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과 협박을 단지 개인적인 이해 관계의 일로 여기지 않고 바로 이와 같이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로 해석하였습니다. 정확한 역사 인식입니다. 정확한 성경 해석입니다. 에베소서 6: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포츠나 영화 TV등에 너무 열광하다 보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독재자들이 이러한 것으로 대중을 통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현상 속에서도 눈앞의 현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핵심을 꿰뚫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이러한 합심기도를 통해 깊은 영적 통찰력을 지닌 자들은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고 맞서 싸워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들의 기도는 그 핵심을 실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신자가 가지고 있는 분명한 역사인식입니다.
27~28절에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열방’, ‘세상의 군왕들’은 ‘빌라도’로 대표되며, ‘족속들’과 ‘관원들’은 헤롯으로 대표된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구약의 예언들이 하나도 어그러짐 없이 분명하게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라고 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원수처럼 싫어하는 사이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서는 일치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이들이 사단의 하수인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선민으로 자처하면서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이방인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은 복음을 반대하기 위하여서는 그 어떤 일도 못할 것이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단과 연합한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야합과 대적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24절에 창조주이심을 고백했고, 25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말했으며, 28절에서는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헤롯과 빌라도와 같은 악인들의 행위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이루는데 이용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충동하거나 강박하여서 예수를 죽이게끔 유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착각하면 그 죄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만든 분이 하나님이시고, 인간이 결국 그 열매를 먹을 것을 알면서도 놓아두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라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치졸한 논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인 우리는 오히려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주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할 기회를 주셨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악을 행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그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극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기득권 유지라는 정욕에 휩싸여서 예수님을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행마저도 구속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하여 선을 이루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합심기도는 바로 이러한 고백을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 얼마나 큰 스케일의 기도입니까?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신자는 내일 일을 위하여 근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성공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아픔이 있더라도 오로지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주권역사만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가 바로 이렇게 올바르고 크신 하나님의 주권 역사를 찬양하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합심기도는 신자에게 주어진 거룩한 사명을 완수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신자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결단입니다. 그만큼 신자의 기도는 힘이 있고 분명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오늘 예루살렘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광된 사명을 우리로 하여금 완수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9~30절에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세 가지의 간구가 나옵니다. 먼저 첫 째로 대제사장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대교 세력의 위협을 간과하지 말고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감하옵시고’라는 말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고난이 없거나 감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도록 돌봐 달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편안히 살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강하게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쉬운 일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편하게 앉아서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서 나를 훈련시키고 변화시켜 달라는 적극적인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러한 기도여야 합니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나의 평안만을 바라고 세상적인 물질과 명예를 누리기를 간구하는 것은 종교인이며, 세상의 불신자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니 저들보다 더 나쁘고 간악한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를 알고 하나님의 섭리와 이치를 아는 성도들이라면 이제는 기도의 차원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을 ‘하감하옵시고’ 우리로 하여금 주의 일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분명한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그러니 다음 기도는 당연히 ‘복음 전파’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난에서도 성도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고난에도 움츠려 들지 않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만큼은 포기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현재 우리에게 닥친 각종 상황을 ‘하감하옵시고’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첫째 간구와 둘째 간구가 기가 막히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하감하여 주시면 열심히 돈을 벌거나 놀러다니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려고 하니 우리의 상황을 하감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신자의 기도는 이처럼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목적은 우리를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신자의 길입니다.
셋째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이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한 것으로 인하여서 이러한 어려움이 닥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계속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고난보다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계속하여 공급되기를 바라는 참 성도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이 나타남으로 자신들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려는 마음도 아니요,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자극하려함도 아닙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확장하려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들로 말미암아 죄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고난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죄악에서 건지심을 받는다면 당연히 그러한 고난과 아픔도 감수해야 한다는 기도입니다. 이기주의가 아닌 이타주의입니다. 인본주의가 아닌 신본주의입니다. 세상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기도입니다. 신자의 기도는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우선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들으십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가 이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마자 하나님께서는 바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지체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심이나 간악한 의도가 전혀 없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31절에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고 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이기 때문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에 이러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 주신 사명을 이루게 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도의 진실한 합심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성령이 충만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도들의 간절한 합심기도가 열납되었다는 가시적 증거입니다. 이러한 성령 충만은 앞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한 ‘성령 충만’과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 충만은 거기에 모인 무리들에게 단 한번 일어난 특별한 경험입니다. 그리고 오늘 기록된 ‘성령 충만’은 그러한 오순절 성령 충만을 이미 경험한 자들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가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계속하여 역동적인 사명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은혜를 주는 반복적인 현상입니다. 곧 이어지는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고난과 위협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저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도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기도한 결과에 ‘성령 충만’으로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이 임한 결과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사도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조건 고난을 피하고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 고난도 이겨낼 힘을 달라는 차원 높은 기도였습니다. 또한 뻔히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를 중단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그로 인하여 주목받고 위험에 처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에게 표적과 기사가 주어지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희생하고 인내하며 전하는 것이 신자가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멋진 신앙의 고백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가 처한 환경을 바꿔달라고 간구하지 아니하고 내가 먼저 변하기를 기도하는 차원 높은 경향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남기기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