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

여호와의 말씀

Posted on 02 Jun 2013, 설교자: 김동관 목사 (Kim, Dong Kwan)

2013년 6월 2일 주일예배 설교
삼상 3:15-4:1a (1 Samuel 3:15-4:1a)

하나님께 드려진 아이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는 사무엘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선지자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이 사무엘에게 임한 여호와의 첫 번째 말씀은 엘리 제사장 가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악이 심히 크고 중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서 아들들을 바로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당시 12살 정도로 추정되는 아이 사무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영의 아버지처럼 따르고 생활했던 스승 엘리 가문에 대한 심판의 내용은 사무엘에게도 충격이지만 그 소식을 듣고 낙심하며 괴로워할 엘리를 생각하면 차마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있는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말이라면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논점을 비켜갈 수도 있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그 어떤 누구라도 절대로 가감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말씀이 듣는 사람이나 전하는 사람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에는 여호와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전해진 후의 일은 선포자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한 반응까지 생각하는 것은 주어진 역할과 한계를 넘어서는 월권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때나 들을 때에 있는 그대로 전하고 들어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의 사정을 생각하고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듣는 자는 전하는 자에게 원망하고 불평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모두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전달에 있어서 전하는 자의 태도와 주변 상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내용’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전달하는 방법적인 것에서는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또한 그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 다 말했으니 나에게는 결과에 대한 그 어떤 책임이 없다!’는 식의 태도는 오히려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적대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며, 또한 그 전해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고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은 하나라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선 1~14절에는 사무엘에게 임한 첫 번째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엘리 가문에 임한 여호와의 심판이었습니다. 이는 굉장히 무거운 내용입니다. 자신의 스승이며 영적인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엘리 제사장에게 당신과 당신의 가문이 죄악으로 인하여 영영히 심판을 당하겠다고 하는 계시를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사무엘의 태도와 심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사무엘이 아침까지 누웠다가 여호와의 집 문을 열었으나 그 이상을 엘리에게 알게 하기를 두려워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아이 사무엘이 맡은 일은 아침에 성전 문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문이 있었고 그 문들을 열고 닫는 것이 사무엘의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무엘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그 마음이 심히 무거웠습니다. 간밤에 받은 여호와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어려운 일을 사무엘을 통하여 진행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무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시작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성공과 권력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길의 첫 시작은 사무엘처럼 괴롭고 힘든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길을 우리가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이고 연약하고 생각이 많아서 할 수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상황을 변화시키고 동원하여서 우리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말을 통하여 ‘여호와의 말씀’ 선포의 첫 걸음을 내딛을 수가 있었습니다.
16절에 “엘리가 사무엘을 불러 가로되 내 아들 사무엘아 하니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심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이 불렀습니다. 사무엘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것을 엘리 제사장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엘리 제사장은 그 말씀이 자신의 신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지금 현재 대제사장인 자신에게 임하지 않고 자신에게 배우는 사무엘에게 임했기 때문이며, 또한 그 사실을 자신이 알 수 있도록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들들의 죄악과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이제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신을 떠나 사무엘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불러서 그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듣기 원한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내 아들 사무엘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깊은 사랑과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뒤를 사무엘이 이어받을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 할 수 있도록 강한 어조로 요청하였습니다.
17절에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사실 엘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가문이 멸절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아이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셨다는 사실로 인하여서 어느 정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이제는 사무엘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는 엄격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아무런 가감 없이 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은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서약 의식’을 행할 때에 사용된 말로, 만약 계약의 당사자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약속을 어기면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맹세의 의미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엘리의 적극적인 의지로 인하여 사무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18절에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엘리의 강청으로 인하여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조금도 숨기거나 주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어린 사무엘은 자신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역을 훌륭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그 대상이 자신의 스승이며 영적인 아버지인 엘리 제사장이었음에도 말입니다. 그 결과는 엘리 제사장의 인정이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사무엘이 전한 말씀이 한 치의 더하거나 빠짐도 없이 여호와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알다시피 엘리 가문에 대한 멸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무엘을 향하여 화를 내거나 비방하거나 멸시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무엘의 말이 아니라 사무엘을 통한 여호와의 말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의 말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인정하였다는 말입니다. 또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잘못을 분명하게 인정하며 그로 인한 심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는 고백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라면 즉시 그 자리에서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아무리 억울해 보여도 여호와의 말씀이 옳습니다. 잠언 14: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매를 맞고 징계를 받는 것이 부당하게 생각되고 하나님께서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고 전적으로 우리의 잘못이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반드시 옳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대적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우리에게 반드시 옳습니다. 만약에 나에게 어려움과 고난이 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연단을 위함이거나, 아니면 우리의 죄악된 결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경우는 없습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며 주어진 결과에 대하여 즉시 자복하며 회개하는 것만이 올바른 신자의 모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가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여호와의 말씀’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게 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하고 반항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양심의 찔림으로 인한 반응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자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결국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목적이나 의도에 따라서 그 사람을 이용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의 말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사무엘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19절에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말이 다 이루어지도록 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의 역할에 충실한 사무엘에게 주어진 놀라운 은혜입니다. 물론 사무엘의 말은 사무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모든 말이 아니라 사무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여호와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선지자 사무엘이 자신의 말이 아닌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하는 한 그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1절에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의 말이 아닌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전하는 ‘여호와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능력이 없어서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지만 인생이 아니신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십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선택하신 사람으로 인하여 전해지는 ‘여호와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지 마시고 그 사람을 통하여 전해지는 ‘여호와의 말씀’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서로가 형통한 길을 가게 됩니다. 따라서 오늘 선포되는 설교가 ‘여호와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 말씀이 사람의 의도가 들어간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선포하는 설교자를 치실 것입니다. 무익한 종이며 사악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하는 것이라면 그 말씀을 거절하는 그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화를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세우신 설교자를 통하여 전해지는 말씀이 나에게 주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임을 굳게 믿으시고 겸손히 인정하시면 형통한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설교자의 말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20절에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전부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즉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여호와께서 세우신 선지자로 알고 인정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의 말을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하여 선지자 사무엘은 더더욱 겸손하게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무엘의 말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선한 순환은 이스라엘 온 땅에 사무엘의 이름이 선지자로 세워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한 나타내심은 당시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실로에서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21절에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고 했습니다.
한글 번역으로 생각하면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원문의 뜻은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계속하여 나타나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무엘과 늘 동행하시면서 실로에서 특별히 나타내심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실로는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곳입니다. 그 곳에서 언약궤나 성막의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으시고 ‘여호와의 말씀’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작이며 마침입니다. 성경 원본이나 언약궤와 같은 특별한 물건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그러한 물건이 왜 사라졌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지금 우리에게 성경 원본이나 언약궤와 같은 특별한 물건이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난리가 날 것입니다. 순례자가 모여들고, 온갖 기적을 바라는 망상에 빠진 연약한 무리들이 차고 넘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물건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종교인들도 생길 것입니다. 성경 원본에 들어 있는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그 원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능력(물론 없지만)에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기록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는 구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수많은 종교인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다시 한 번 ‘여호와의 말씀’에만 집중하도록 하시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시 싸우러 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언약궤’에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뜻밖에도 참패하였고 언약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그 어떤 훌륭한 사상이나 과학이나 수많은 재물도, 또한 완벽하게 보이는 인간의 법과 제도도 ‘모래위에 세운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그 어떤 다른 것에도 인생의 목표를 두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큰 교회당과 유명한 목사에게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몇 대를 내려오는 신앙의 가문이나 업적만을 자랑으로 여기고 의지하고 계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학위나 명성으로 뿌듯함을 느끼십니까? 그러한 것은 조그마한 시련과 고난에도 무너지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기초를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의 말씀’만 믿고 의지하며 그대로 전하는 자는 그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4장 1a절에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사무엘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무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곧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을 여호와의 선지자로 인정하였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이 좋은 가문이어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사무엘이 좋은 학교를 나오거나 학위가 있어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에게 무슨 달변의 능력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말씀만을 있는 그대로 전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만을 전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의 모든 말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여호와의 선지자로 분명하게 믿고 따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오늘 주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호와를 믿고 인정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렇게 주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이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순수하고 분명하게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며 그대로 전하는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말씀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축복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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